독립운동 발자취를 찾아서…만주에 서린 한과 얼

입력 2018-10-29 12:00  

독립운동 발자취를 찾아서…만주에 서린 한과 얼
항일투쟁·고구려역사 중국화…윤동주,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으로



(투먼·룽징·지안=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만주와 연해주는 각각 중국과 러시아에 속해 엄연히 구분되는 지역이지만, 우리 민족 역사에서는 하나로 연결되는 땅이다.
만주 역시 독립투쟁의 현장이었고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다.
연해주에 고려인이 있다면 만주로 건너간 한민족 자손들은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찬란한 역사를 뒤로하고 민족의 아픔과 한이 깃든 땅으로 남은 만주 주요 유적지를 찾았다.
그곳은 고구려 유적지와 항일투쟁 역사를 중국이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현장이기도 했다.



◇ 중국이 세운 봉오동전투 기념비
훈춘(琿春)에서 서쪽으로 약 1시간 거리의 투먼(圖們)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남양과 마주하는 중국의 국경도시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에는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편성됐다.
1920년 6월 7일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온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중국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 봉오동(鳳梧洞)에서 홍범도 등이 이끈 독립군 연합부대가 쳐부순다.
한국독립운동사상 일본 정규군과 싸워 최초로 승리한 것으로 기록된 봉오동전투다.
지난 24일 찾아간 전적지에는 댐이 들어서 현장을 직접 볼 수는 없었다.
다만 댐 아래 봉오저수지 입구 부근에 봉오동 전적지비가 있다.
1993년 투먼시가 세운 작은 기념비에는 "연변반일무장투쟁에서 거둔 이 승첩은 일본 침략자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놓았으며 인민대중의 반일투지를 크게 북돋아주었다"고 쓰여있다.
2013년 투먼시 인민정부는 몇 배 더 큰 기념비를 새로 세웠다.
새 기념비는 최근 같은 자리에서 다시 한번 교체된 듯했다. 한눈에 봐도 다시 만든 새 비석을 기존 기념비 사진 자료와 비교해보니 문구가 달라지거나 추가된 부분이 있었다. 만주 항일투쟁사를 중국화하는 작업의 하나로 보였다.
애초 이 기념비에는 '봉오골 반일전적지'라고 쓰여있었으나 지금은 '봉오골(동)전투기념비'라고 표기됐다.
전투소개 문장도 차이가 있었다.
봉오동전투에 대해 "중국 조선족 반일무장이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지하에서 처음으로 일본 침략군과 맞서 싸워 중대한 승리를 거둔 규모가 비교적 큰 전투"라고 소개한 부분이 추가됐다.
작은 기념비와 같은 문장에는 "청산리대첩을 위한 정치적, 군사적 기초를 닦아놓았으며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반일투지를 북돋아 주고 반일력량의 련합통일을 촉진하였다"는 부분이 추가됐다.



◇ 관광공원화하는 윤동주 생가
중국 지린성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주도 옌지(延吉)에서 약 30분 거리인 룽징(龍井)시에는 명동촌(明東村)이 있다.
조선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동쪽(조선)을 밝힌다'는 뜻으로 세운 마을이다.
명동촌에는 윤동주 생가가 복원됐고, 명동학교 옛터에는 기념관이 들어서 있었다.
민족혼을 불러일으킨 항일투쟁 중심지는 구석구석 깨끗하게 단장된 관광지 느낌이었다.
윤동주 생가 입구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적혀 있다.
중국은 지난 2012년 8월 명동촌 생가를 복원하며 이렇게 적힌 초대형 안내석을 세웠다.
국내 문학계 등에서는 모든 작품을 한글로 쓴 민족시인 윤동주를 중국의 애국시인으로 규정한 데 반발했다.
명동촌은 봉오동 전적지와 마찬가지로 '연변조선족자치주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돼 관리 중이다.
명동촌 중심에는 윤동주의 외삼촌인 독립운동 지도자 김약연이 있다.
그는 1899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이주해 명동촌을 일구고 명동교회와 명동학교를 세웠다.
윤동주의 기독교사상의 바탕이 명동교회다. 명동학교는 윤동주와 문익환, 송몽규, 나운규 등을 배출했다.
명동촌에서 서기를 지낸 송길연(63) 씨는 "명동학교 졸업생 99%는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3.13운동에 앞장선 것도 명동학교 학생들"이라고 설명하며 "역사는 흘러가지만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3.13운동이란 1919년 3월 13일 옌볜 룽징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일 시위다.
이를 기점으로 만주 전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1920년 15만원 탈취사건,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등 무장투쟁으로 이어졌다.


◇ 동북공정의 현장, 지안시 고구려 유적
북한과 접경한 압록강변 지안(集安)시에는 광개토대왕릉과 고구려 국내성, 환도산성 등 고구려 유적이 가득하다.
인구 20만명 규모 소도시지만, 고구려 유적을 활용해 유명 관광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지안의 고구려 유적은 지난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지난 26일 찾은 이곳에서는 우리 민족의 찬란한 역사의 흔적을 중국이 관리하면서 겪게 된 가슴 아픈 현실을 마주했다.
광개토대왕릉비와 광개토대왕릉 역시 그 장엄함을 억누르려는 듯 관광명소처럼 꾸며져 씁쓸함을 자아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사면이 유리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높이 6.39m 거대한 비석이 유리관 안에 갇혀 있고, 유리관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도 금지됐다.
CCTV로 유리관 내부를 감시해 사진 촬영하면 제재한다고 한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이후 고구려 유적지에서의 중국 측 횡포는 더 심해졌다고 한다.
조선족 관광가이드는 "작년에는 고구려 유적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설명을 못 하게 했다"며 "우리 할아버지 앞에서 설명을 못 하게 해 힘들었는데 올해는 나아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수왕릉으로 알려진 장군총에서 여전히 중국의 '갑질'이 계속되고 있음을 목격했다.
한국어로 설명 중인 가이드에게 중국인 관리원이 오더니 "말을 하지 말고 둘러보라"고 강압적인 태도로 말했다.
가이드 반발에 관리원은 막무가내로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탐방단은 순례 일정 중 지안과 투먼 외에도 백두산 천지, 훈춘, 단둥(丹東) 등 북한과 맞닿은 접경 지역을 여러 차례 거쳤다.
두만강과 압록강 건너 북한 땅을 바라보며 돌아보는 독립운동과 고구려, 발해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맞물려 묵직한 울림을 전했다.
일정에 동행한 조선족 홍 모(49) 씨는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살면서 남의 나라에 사는 것 같았는데 이번 탐방을 통해 그게 아니고 내 조상 땅을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doubl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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