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오스트리아 호텔서 잠자다 탈출…"죽음의 문턱 넘었다"
(수원=연합뉴스) 김인유 기자 = 지난달 동유럽 패키지여행을 갔던 한국인 관광객 69명이 오스트리아의 한 호텔에서 잠을 자다 하마터면 화재로 큰 일을 당할뻔한 사실이 귀국한 관광객들의 입을 통해 1일 뒤늦게 알려졌다.
이들 관광객은 화재 당시 여행사의 인솔 가이드와 호텔직원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건 탈출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개하면서 여행사에 책임추궁과 배상요구를 하고 있다.
경기 수원시에 사는 최 모(51) 씨는 친구 2명과 함께 지난달 20일 8박 9일 일정으로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를 둘러보는 패키지 관광에 나섰다.
생애 첫 친구들과의 동유럽 여행에 신이 난 최 씨 일행의 행복은 지난달 21일 여행 두 번째 방문지인 오스트리아에서 공포로 변했다.
모차르트 생가와 유명 관광지 방문 일정을 마치고 숙소인 레또르(Retro) 호텔에 들어가 잠을 자던 이들은 다음날(22일) 새벽 1시께 매캐한 냄새와 사람들의 웅성웅성하는 소리에 잠을 깼다.
2층 복도 끝방에 있던 최 씨 일행은 불이 났다는 것을 직감하고 출입구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미 복도에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커먼 연기가 가득 차 있었고 사람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1층으로 대피하는 계단은 맨발에 잠옷만 걸친 관광객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고 한다.
무사히 호텔 밖으로 나간 최 씨 일행의 눈앞에는 같은 처지의 한국인 관광객 수십명이 공포와 추위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 호텔에는 당시 H와 N 등 한국여행사 2곳의 한국인 패키지 관광객 69명(H여행사 31명, N여행사 38명)과 N여행사 가이드 1명 등 70명이 묵고 있었던 것으로 관광객들은 전했다.
호텔 1층 식당에서 발생한 불은 1층만 태우고 2∼3층 객실로까지는 번지지 않은 채 오스트리아 소방당국에 의해 진화됐다.
한국인 관광객들은 소방관의 안내에 따라 호텔에서 300m 떨어진 체육관으로 대피했다. 신속히 대피한 덕에 관광객 중 사망하거나 크게 다친 사람이 없었다.
이들은 논의 끝에 나머지 여행일정을 마치기로 하고 헝가리와 체코를 관광하고 나서 지난 28일 귀국했다.
69명의 한국인 관광객이 화마에 희생될뻔한 아찔한 화재사건은 당시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다.
조용히 묻힐뻔한 이 사건은 귀국한 관광객 가운데 일부가 당시 상황과 여행사의 대처에 불만을 공식적으로 제기하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최 씨는 지난달 30일 H여행사와 N여행사 대표 앞으로 화재 당시 상황과 가이드의 태도를 설명하고, 피해 관광객에 대한 여행사의 적극적인 배상을 요구하는 내용의 통보서를 등기우편으로 보냈다.
최 씨는 "가이드의 임무는 관광객에게 닥칠 만일의 안전사고에 대비해 관광객과 함께해야 하는데 어떤 가이드는 화재 당시 다른 호텔에 투숙했고, 화재 상황을 소방관을 통해 알려달라는 관광객의 요구를 묵살했다"면서 "이런 행태가 올바른지 따져서 책임을 물어달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화재 다음날 저녁때 오스트리아 한국대사관에서 서기관이 나와 오스트리아 정부에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요청을 정식으로 하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요청했는지와 앞으로 재발 방지 대책이 마련됐는지도 성의있게 답변해 달라"고 여행사 측에 요청했다.
최 씨는 "불이 난 1층 내부가 방염 자재여서 불길이 금방 확 2∼3층 객실로 번지지 않아 투숙객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어줬다고 들었다"면서 "지금도 그때 일만 생각하면 몸서리가 날 정도로 끔찍하다"고 말했다.
최 씨 말고도 똑같은 경험을 한 다른 관광객이 지난달 31일 여행사 홈피에 같은 내용의 글을 올렸다.
'pinky48..'이라는 관광객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레또르호텔 화재사건-목숨을 건 탈출'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우리 가족은 꿈나라 중이었는데 잘못되었다면 정말 꿈나라로 갈 뻔했다"면서 "2층에서 뛰어내리려는 사람, 넘어져 다친 사람…6·25 때 난리는 저리가라였다"고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전했다.
그는 이어 "한국 도착 후 여행용 가방 안에 있던 옷, 속옷, 신발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서 모두 버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날의 악몽이 되살아나서 자다가도 숨이 막히고 놀라 벌떡 일어난다"며 "관광객의 정신적인 피해와 육체적인 고통, 여행일정의 차질은 어떻게 보상할 건지 여행사에 묻고 싶다"고 밝혔다.
최 씨도 "인생 최대의 끔찍한 경험을 한 관광객들이 귀국할 때 여행사 누구도 공항에 나와 사과를 하거나 안부를 묻지도 않았다"면서 "귀국 다음 날인 29일 폐 CT를 찍어보라는 전화를 했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오지도 않았다"고 분개했다.
그는 이어 "아직도 연기를 많이 마셔서 기침하고 있는데 여행사 측은 보험처리가 됐는지, 앞으로 어떻게 치료와 배상을 할 것인지 전혀 안내가 없다. 여행사의 갑질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H여행사 관계자는 "화재당시 가이드가 병원안내 등 관광객을 위해 노력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배상 부분은 현지 호텔의 책임 등 여러 가지 알아볼 게 있어 시간이 좀 걸릴 수 있다"고 해명했다.
N여행사 관계자도 "정말 끔찍한 사고가 날뻔했는데 모두 무사해 천만다행"이라면서도 "사고 당시 관광객이 요구하는 내용을 정확히 파악해 대처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hedgeho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