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에서 광해군일기만 활자본이 없는 까닭은

입력 2018-11-08 17:25  

조선왕조실록에서 광해군일기만 활자본이 없는 까닭은
오항녕 전주대 교수, 실록 연구서 2권 출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국보 제15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간 조선에서 벌어진 일을 상세하게 담은 기록물이다.
실록은 기사 작성, 편찬, 보존이라는 치밀한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당대 역사를 기술하는 사관에 권력이 개입하지 않도록 실록 초고인 사초(史草)에 실명제를 도입하고, 편찬이 끝나면 사초를 파기하는 세초를 했다.
하지만 실록은 단순한 역사 서술이 아니어서 투쟁과 갈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귀양을 떠난 사화(史禍)가 단적인 예다.
실록은 대부분 활자본으로 간행했는데, 유독 광해군일기만은 필사본만 남았다. 초고를 수정한 중초본(中草本·태백산본)과 중초본을 바탕으로 완성한 정초본(正草本·정족산본, 적상산본)이 각각 존재한다.
그렇다면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내려온 광해군(재위 1608∼1623)만 활자본 실록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조선시대 사관제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오항녕 전주대 교수는 역사비평사가 펴낸 실록 연구서 '후대가 판단케 하라'에서 "인조 2년(1624)에 시작해 인조 11년(1633)에 편찬이 중단된 광해군일기가 활자본으로 나왔다면 가장 오랜 편찬 기간 소요라는 기록을 세웠을 것"이라며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저자는 먼저 인조 2년에 이괄의 난이 발생하면서 흩어진 사초와 시정기(時政記·춘추관이 관장해 행정의 잘잘못을 기록한 1차 기록물)를 수집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지적한다.
보다 근본적인 요인은 재정이었다. 광해군이 15년간 궁궐 재건을 추진하면서 경제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기에 실록을 간행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 정묘호란이 터져 재정적 압박이 가중됐다며 "호란 이후 후금과 조선은 형제 관계를 맺었는데, 그 대가로 조선이 치른 경제적 손실은 매우 컸다"고 설명한다.
인조(재위 1623∼1649) 대에는 광해군일기 편찬뿐만 아니라 선조실록을 수정하는 작업도 이뤄졌다.
선조실록 수정은 조선왕조실록 편찬사에서 사실상 초유의 일이었다.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세력은 곧바로 선조실록 수정을 요구했으나, 광해군일기 편찬에 밀려 결국 효종 8년(1657)에 완료했다.
그런데 광해군 대에 나온 선조실록도 광해군일기처럼 사초가 부족해 편찬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으로 각종 서적과 승정원일기, 사초가 불탔기 때문이다.
저자는 임진왜란으로 인한 자료 유실, 편찬에 참여한 관료의 불성실을 선조실록 편찬 지연 이유로 지목하고는 "옥사가 지속하고 정세가 혼란스러워 편찬, 봉안, 세초가 모두 늦어졌다"고 주장한다.
선조실록 수정은 책을 완전히 새롭게 간행하지 않고, 일부만 고치는 수준으로 진행했다. 즉 기사를 보완한 뒤 평가에 해당하는 사론(史論)을 수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분량은 광해본 선조실록 221권, 효종본 선조수정실록 42권이다.
저자는 "효종본은 중복된 내용은 피하고 빠진 사실을 보충하거나 왜곡됐다고 판단한 사론만 수정했다"며 "동서분당, 기축옥사, 임진왜란에 대한 기사를 중심으로 보완 작업을 벌였다"고 강조한다.
사론 수정은 광해군 대 집권 세력에 대한 평가를 뒤집고, 비판한 인물의 위상을 높이는 방향으로 했다.
예컨대 광해본은 류성룡에 대해 "왜와 강화(講和)를 주장했고, 부모님을 뵈러 가서는 술을 마셨다"고 나쁘게 평가했는데, 효종본은 "전란을 수습하려는 노력은 당시에도 세간의 인정을 받았고 학행과 효우로 주변의 칭찬이 자자했다"고 기록했다.
반대로 광해군 대 실세였던 이이첨은 "천성이 영특하고 기개가 있었으며 간쟁하는 기품이 있었다. 바른 사람이다"라는 평가가 "간사하고 악독한 성품으로 일찍이 사헌부·사간원에 들어가 오직 공격하고 해치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로 바뀌었다.
저자는 현종실록, 숙종실록, 경종실록도 수정이 가해졌음을 상세히 설명한 뒤 "실록을 수정했다고 해도 그 차이는 크지 않았으며, 전체적으로 보면 대부분의 사실은 같고 일부 관점과 해석에서 차이가 난다"고 말한다.
이어 "역사가 사회에서 가져야 할 기능과 역할,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원칙, 수정 대상이 된 실록을 폐기하지 않고 함께 남긴다는 원칙은 지켜졌다"고 강조한다.
역사비평사는 '후대가 판단케 하라'와 함께 오 교수가 조선왕조실록 편찬 과정과 사관(史官) 역할 등 실록의 특징을 정리한 '실록이란 무엇인가'도 출간했다.
후대가 판단케 하라 = 502쪽. 2만5천원.
실록이란 무엇인가 = 572쪽. 2만8천원.



psh59@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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