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질량(㎏) 기준 변화와 도량형 국제화

입력 2018-11-17 13:30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질량(㎏) 기준 변화와 도량형 국제화


(서울=연합뉴스) 프랑스 혁명이 한창이던 18세기 말 프랑스 과학자들은 또 다른 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도량형 단위를 통일해 이를 전 세계로 확산하겠다는 시도였다. 당시 프랑스에는 약 800개의 이름으로 25만여 개의 길이·부피·무게 단위가 쓰이고 있어 혼란이 극심했다. 파리과학아카데미에 모여든 과학자들은 새로운 도량형 체계를 만들자는 데 합의하고 몇 가지 원칙과 목표를 정했다.

첫째는 모든 단위의 기본이 되는 표준 원기(原器)를 잃어버리더라도 누구나 쉽고 똑같이 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과학적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1야드는 영국 왕 헨리 1세가 팔을 쭉 뻗었을 때 코끝에서 엄지손가락 끝까지의 길이에서 비롯됐다고 한다(중세 영국에서 땅의 면적을 측정하는 도구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둘째는 십진법을 채택한다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대부분 '야드는 피트의 세 배' 식으로 십진법이 적용되지 않았고, 단위 간에 상관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전까지 프랑스는 '피에 드르와'(약 325mm)란 단위를 가장 많이 썼다. 기원전 5∼6세기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 황제가 정한 '큐비트'(Cubit)의 절반으로, 고대 로마 때 표준 단위로 사용하다가 기원후 8∼9세기 샤를마뉴 대제가 새로 정했다.

프랑스과학아카데미는 1790년 적도에서 북극까지 자오선의 1천만 분의 1을 1m로 하자고 제안했다. 전체 자오선 길이가 아닌 적도에서 북극점까지 거리를 기준으로 삼은 까닭은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남반구 지역에 관측소를 설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가로·세로·높이 각 10㎝ 정육면체 부피는 1ℓ, 1ℓ 부피 4℃ 물의 질량을 1㎏으로 하는 등의 기준이 제시됐다. 1795년 황동으로 임시 미터 원기를 만든 데 이어 1799년 백금으로 된 표준 미터 원기를 만들었다. 그해 12월 10일 프랑스는 처음으로 미터 단위 사용법 제정했다. 이를 역사가들은 미터법 혁명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다른 단위도 파생돼 1㎏ 물체를 초당 1m 가속하는 데 필요한 힘은 1뉴턴(N), 1N의 힘을 가해 물체가 1m 이동했을 때 한 일은 1줄(J), 1기압에서 물 1g을 14.5℃에서 15.5 ℃까지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을 1칼로리(㎈) 등으로 정해졌다.

프랑스 혁명 후 집권한 나폴레옹은 유럽 각국으로 진출하며 미터법을 보급했다. 그러나 영국은 예외였다. 나폴레옹이 트래펄가 해전과 워털루 전투에서 잇따라 패해 영국 진출이 좌절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과 영국 식민지이던 미국은 아직도 미터법 대신 야드-파운드법을 쓰고 있다.

미터법이 입안된 지 85년 후인 1875년에야 프랑스를 비롯해 미국·영국·독일 등 16개국 사이에 미터 조약이 체결됐다. 파리를 통과하는 자오선의 북극에서 적도까지 길이를 기준으로 삼는 데 합의했으나, 계절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오선 길이가 일정치 않다는 게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고자 1889년 열린 제1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는 백금과 이리듐 합금의 미터 원기를 만들어 기준으로 삼았다. 이때 킬로그램(㎏) 원기도 함께 만들었다. 이는 프랑스 파리의 국제도량형국에 보관돼 있는데, 당시 40개의 국제 미터 원기와 킬로그램 원기를 제작해 각국에 보급했다.

우리나라도 조선 고종 31년인 1894년 한 쌍을 구입했다. 이후 일본강점기에 일본에 빼앗기고 6·25 때 사라지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현재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이 보관하고 있다. 당시 제작된 국제 미터 원기와 킬로그램 원기를 지금도 모두 소장하고 있는 나라는 23개국에 불과하다. 미터 조약 가입국은 1900년 21개국, 1950년 32개국으로 늘어났다. 지금까지 미터법을 표준 도량형으로 채택하지 않은 나라는 미국·미얀마·라이베리아 3개국뿐이다.

미터의 기준은 1960년 '진공에서 크립톤-86 원자의 2p10과 5d5 준위 사이의 전이에 해당하는 복사 파장의 165만763.73배'로 바뀌었다가 1983년 '진공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로 변경됐다. 원기에만 의존하던 킬로그램 기준은 양자역학에 등장하는 '플랑크 상수'로 130년 만에 바뀐다. CGPM은 16일(한국시간)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열린 제26차 총회에서 빛 에너지와 파장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값 '6.626 070 15×10-34'를 1㎏으로 정하기로 결의했다. 이와 함께 전류의 기본단위인 암페어(A), 온도의 기본단위인 켈빈(K), 물질의 양을 나타내는 기본단위인 몰(mol)의 정의도 새롭게 정했다. 이는 130년 만의 일로 2019년 5월 20일부터 적용된다. 미터를 비롯해 시간을 나타내는 초(s), 밝기의 단위인 칸델라(cd) 기준은 이번에 바뀌지 않는다.


서양의 도량형을 보면 근대 이전까지는 전제 왕권에 의해 기준이 정해졌다가 프랑스 혁명 이후 과학성·보편성의 원칙이 확립돼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동양)의 도량형은 인간적이다. 사람이 한 시간에 걷는 거리는 10리, 한 사람이 누울 만한 넓이는 평, 목마른 사람이 단숨에 들이켤 수 있는 물의 양은 홉, 한 말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땅의 넓이는 마지기 등이다. 피부에 와 닿기는 하지만 도량형 단위 간에 연관성이 없고 10진법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더욱이 사람마다 체감하는 정도가 다르니 도량형 기준이 지역마다 시대마다 달라지기도 한다. 소설 '삼국지연의'를 보면 9척 장신이 수두룩하게 등장한다. 소설적 과장법을 감안해도 당시 한 자의 길이가 지금(30.3㎝)보다 짧은 20∼23㎝였다는 사실을 모르면 납득하기 어렵다. 촉한의 장수 장비가 휘둘렀다는 장팔사모(丈八蛇矛)는 요즘 척관법으로 따지면 5m 40㎝에 달한다.

도량형은 징세와 거래 등의 기준이기 때문에 조세 정의와 시장질서를 확립하려면 도량형을 통일하는 게 필수적이다. 이는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 이후 역대 왕조의 가장 큰 과업이었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1902년 대한제국 시절 미터법을 도입한 우리나라는 1959년 미터 조약에 가입한 데 이어 1961년 계량법을 제정해 1964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단계별로 미터법 사용을 확대해왔으며 2007년 7월부터는 부동산 넓이를 평 대신 제곱미터(㎡)로 표시하도록 하고 있다.

도량형을 통일하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인류를 하나로 묶고 지구촌의 소통을 촉진하는 데 필수적이다. 킬로그램의 기준이 바뀌는 것을 계기로 도량형 변천사를 더듬어보며 글로벌시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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