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불신 커 정부 역할 중요…文대통령 '공정한 중재자' 약속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새로운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가 22일 '사회적 대타협'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탄력근로제 확대 적용 문제를 비롯해 경사노위에서 다룰 의제를 놓고 노사 양측의 의견이 극명하게 대립하는 데다 대화·협상보다는 대결로 치닫는 문화가 남아 있어 험로가 예상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경사노위 본위원회 첫 회의에 참석해 "우리가 추진하는 사람중심경제, 노동존중사회, 포용적 성장과 포용 사회, 혁신 성장과 공정 경제는 정부의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면서 "모든 경제 주체들이 지혜를 모으고 양보와 타협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야만 가능하다"고 밝혔다.
정부는 노동존중사회를 비롯한 국정 목표를 사회적 대화를 통해 갈등을 줄여나가며 추구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다. 이번에 출범한 경사노위는 사회적 대화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
경사노위가 기존 노사정위원회에 참가한 주요 노·사단체와 정부 대표뿐 아니라 청년, 여성, 비정규직, 중소·중견기업, 소상공인 대표를 포함한 것도 사회 변화를 반영해 명실상부한 사회적 대화를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경사노위가 다룰 의제를 보면 쉽게 타협점을 찾을 수 있는 사안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사노위가 산하에 노동시간 제도 개선 위원회를 설치해 논의할 탄력근로제 확대 적용 문제는 노동계와 경영계의 첨예한 쟁점이 되고 있다.
경영계는 현행법상 최장 3개월인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을 1년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노동계는 노동시간 단축을 무력화할 수 있다며 반대한다. 민주노총은 지난 21일 탄력근로제 확대 적용 반대를 전면에 내걸고 총파업을 했다.
경사노위 산하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 위원회가 지난 20일 발표한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에 관한 공익위원 권고안은 경영계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
경영계는 해고자·실업자의 노조 가입 허용을 포함한 공익위원 안이 실현되면 '노조 천국'이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노동계는 공익위원 안이 특수고용직(특고) 노동자의 노동권 보장을 불투명하게 남겨둔 점 등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다.
이를 의식한 듯 문 대통령도 "노동계와 경영계, 정부는 함께 협력해야 한다"며 "자기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는 게 아니라 대화와 타협, 양보와 고통 분담을 통해 합리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노동계와 경영계 사이에 대화·타협의 문화가 부족한 현실에서 사회적 대화의 성패는 결국 정부에 달려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부가 지혜와 인내를 발휘해 중재자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도 "과거에는 정부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사정위원회를 활용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다"며 "정부는 공정한 중재자로서 노동계와 경영계 간의 이견을 좁히고 정책을 실현하는 데 집중하겠다"고 약속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사회적 대화의 실패를 초래한 대표적 사례로 2015년 '9·15 노사정 대타협'을 꼽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 해소, 노동시간 단축, 임금체계 개편 등을 포함한 합의 직후 정부는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 완화를 포함한 '양대 지침'을 밀어붙였다.
대타협에 참가했던 한국노총은 이에 반발해 4개월 만에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했고 사회적 대화는 파탄을 맞았다. 당시 정부는 양대 지침을 밀어붙이기 위해 사회적 대화를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민주노총이 지난달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경사노위 참여 안건을 논의하려고 했으나 정족수 미달로 무산된 것도 정부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때문이라는 게 노동계의 전반적인 시각이다.
1999년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등에 반발해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한 민주노총 내부에는 사회적 대화에 대한 강한 반대 기류가 남아 있다.
정부가 노동정책을 밀어붙이기 위해 사회적 대화를 이용하고 노동계가 '들러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데 대한 거부감이다. 노동계에서는 이를 사회적 대화에 대한 민주노총의 '트라우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명환 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노총 지도부는 사회적 대화에 적극적이지만, 민주노총이 내년 1월 정기 대의원대회에서도 경사노위 참여를 결정할지 장담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가 민주노총을 사회적 대화로 끌어들이기 위해 좀 더 인내를 갖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민주노총 내부에서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게 노동계 안팎의 시각이다. 민주노총이 더는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는 말은 민주노총이 좀 더 사회 문제에 책임감 있게 임해야 한다는 지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노동자의 권익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 못지않게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하다면 고통을 분담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장홍근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저성장과 고용 문제를 비롯해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는 정부 단독으로 풀 수 없고 시장에 맡겨 해결할 수도 없다"며 "사회경제 주체들이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바탕으로 성숙한 자세로 양보를 통해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ljglor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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