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불 사학자들, 독립운동가 홍재하 차남 자택서 대면 조사하고 유품 확인
부친의 독립운동 설명들은 장자크씨 "고국 걱정하며 토론하던 부친 눈에 선해"
"홍재하, 파리서 히로히토 황태자 암살 모의했다는 설도 전해내려와"
파리 7대 리베라산교수 "홍재하, 조국의 고난과 동포 항상 생각한 인본주의자"
(생브리외[프랑스]=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집에는 아버지가 초대한 한국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어요. 무슨 말인지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지금도 이렇게 한국말이 많이 들리니 어린 시절 부친이 동포들을 불러 고국을 걱정하며 밤새 토론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지난 25일(현지시간) 변화무쌍한 겨울 날씨를 자랑하는 프랑스 대서양 연안의 소도시 생브리외(Saint-Brieuc)의 한 프랑스식 주택.
이곳 거실에서는 이날 프랑스와 한국어가 뒤섞이면서 일제 치하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등 고난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의 이야기 타래가 굽이굽이 펼쳐졌다.
집주인 장자크 홍 푸안(76)씨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여느 백인 중산층 프랑스 노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역만리 프랑스에서 일제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했던 부친의 삶을 뒤늦게라도 인정받고 싶은 동포 2세다.
비록 한국어를 모르고 국적도 프랑스지만, 그는 오매불망 고국행을 그리다가 60년 전 파리 근교에 묻힌 부친 홍재하(1898∼1960)의 삶이 재조명되기 시작한 이후 한국이 부쩍 더 가깝게 느껴진다고 했다.
브르타뉴 지방의 유력 정치인과 사업가로 살아온 그는 몇 년 전 지역사회에서 우연히 알게 된 한인 동포 부부(렌 경영대 김성영 교수, 렌2대 송은혜 강사)의 도움으로 부친 홍재하의 삶이 재조명되면서 한국 독립운동가의 아들이라는 자부심이 더해졌다.
이날은 홍재하의 삶을 추적해온 재불 사학자 이장규 씨(파리 7대 박사과정)와 파리 7대 한국학과 마리오랑주 리베라산 교수(한국근현대사)가 홍 푸안 씨의 자택에서 현장조사를 진행하는 날이었다.
프랑스 내 한국독립운동사의 발자취를 더듬어온 이 씨와 리베라산 교수는 홍 푸안 씨를 장시간 인터뷰하고, 그가 작고한 누나로부터 이어받아 소장해온 홍재하 유품의 실물을 꼼꼼히 확인했다.
자료들은 생브리외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대도시 렌(Rennes)에 거주하는 한인 부부 김성영·송은혜 씨가 한인 유학생들과 함께 차곡차곡 분류하고 정리해놓았다.
홍 푸안 씨의 성에 남아있는 푸안(Fuan)은 홍재하가 일제의 압제를 피해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사용한 중국식 가명에서 유래된 흔적이다.
홍재하는 프랑스로 건너오기 한참 전에 일제를 속여 받아낸 일본제국 여권에서 '인정환(印正煥)'이라는 가명을 썼고, 여기서 유래된 '환'(Fuan)을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위장용 이름으로 중국과 러시아에 이어 프랑스에서도 사용했다.
아버지가 남긴 독립운동의 흔적인 이 성을 지금도 쓰고 있는 홍 푸안 씨는 그래서 그런지 프랑스에서 자신을 중국계로 오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래도 쉽게 부친의 삶의 흔적을 버릴 수는 없었다.
한국어를 몰라 답답할 때면 '언제든 해방되면 한국으로 돌아갈 테니 한국말을 여기서 배울 필요는 없다'고 했던 아버지 생각이 더 나기도 한다고.
항상 엄했던 부친이었지만 작고 전까지 늘 프랑스에 온 한국인들을 집으로 불러 먹이고 재우며 고국을 그리워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그는 회고했다.
"아버지는 보통은 매우 엄하셨는데 요리를 꽤 잘하셨어요. 시트롱(레몬 등 감귤류)이 들어간 새콤달콤한 후식은 정말 최고였지요."
홍 푸안 씨는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프랑스 생시르육군사관학교에 교육받으러 온 한국 장교들을 집으로 불러 조국의 재건에 관심을 쏟으며 토론하던 부친의 모습을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연구자들로부터 부친이 1920년대 일본제국 황태자 암살 계획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놀라운 얘기도 전해 들었다.
이장규 씨는 "홍재하 선생이 1922년 히로히토(裕人) 황태자가 프랑스를 방문했을 당시 재불 한인 동지들과 함께 암살을 모의했다가 실패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를 1960년대와 80년대 일부 한국 신문이 생존 재불 동포의 증언을 바탕으로 소개한 적이 있다"고 알려주자 홍 푸안 씨는 매우 놀란 눈치였다.
히로히토는 유럽을 방문하고서 몇 년 뒤인 1926년 제124대 천황에 올랐고, 중일전쟁에 이어 2차 세계대전 등 일제의 팽창주의에 가담했던 인물.
이 씨는 "암살을 모의했다는 증언이 신문기사들로 남아있지만, 이를 증명할 만한 서신이나 지령 등의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홍재하가 프랑스에서도 푸안이라는 성을 계속 쓰는 등 일제의 추적을 피하려 계속 애쓴 점은 그런 추측이 사실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이날 학자들의 현장 연구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리베라산 교수와 이장규 씨는 그동안 홍재하에 대해 연구해온 내용을 홍 푸안 씨에게 자세히 설명해줬다.
부친이 타계한 지 60여 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홍 푸안 씨는 어느 정도 '한'을 푼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한국어를 모르는 처지에 더해 프랑스의 지방에서 백방으로 노력해도 부친의 독립운동 공적을 제대로 평가받을 길이 없었던 홍 푸안 씨는 자신을 발 벗고 돕는 동포 김성영·송은혜 씨 부부와 부친의 삶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리베라산 교수, 이장규 씨에게 "위대한 휴머니즘을 보여주셔서 감사하다"고 거듭 고마움을 표했다.
이장규·리베라산 교수팀은 홍재하의 독립운동 공적을 더 연구해 조만간 한국 정부에 독립유공자 인정과 서훈을 신청할 계획이다.
국가보훈처 측도 "홍재하의 경우 국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극히 제한적이었다"면서 자료가 보강되면 즉각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진행하겠다는 입장이다.
리베라산 교수는 "홍재하는 일제에 저항해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국경을 넘나들며 활동한 국제적인 인물로, 고된 여건에서도 자신의 안위만 살피지 않고 조국과 한국인의 고난을 항상 생각한 인본주의자였다"면서 "생애사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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