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유엔의 자식' 한국 승인 70주년

입력 2018-12-06 08:21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유엔의 자식' 한국 승인 70주년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유엔 데이(유엔의 날)를 아시나요?" 1945년 10월 24일 유엔(국제연합)이 창설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1950년 공휴일로 제정돼 1975년까지 '빨간 날'이었고 지금도 법정기념일이다. 예전 이맘때면 거리에 '유엔 찬가'가 흘러나오는가 하면 유엔 관련 기념우표도 수시로 발행됐고 팔각통에 담긴 유엔표 성냥도 인기를 끌었다. 당시에는 한국이 유엔 회원국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성대하게 기념식을 열고 유엔에 열광했을까.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은 '유엔의 자식'이라고 불렸다. 유엔은 식민지에서 독립한 한국이 제헌국회를 구성하고 정부를 수립하도록 산파역을 했고, 6·25 전쟁이 터지자 유엔군을 파견해 공산화 위기에서 구해냈다. 전쟁의 기아에서 벗어나고 무너진 건물을 다시 세우는 데도 유엔의 도움이 컸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8년 12월 12일, 유엔은 총회를 열어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의 선거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수립된 유일한 합법 정부'란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신생국 코리아가 국제무대에서 어엿한 나라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 문구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인정한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으나 유엔군의 참전 근거가 됐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으로선 생존과 직결된 중요한 외교적 성과였다.


유엔은 1947년 11월 14일 총회를 열어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 구성을 결의했다. UNTCOK의 감시하에 이듬해 5·10 총선이 실시됐으나 소련은 UNTCOK 단원의 북한 입경을 거부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유혈 사태를 빚은 제주도에서도 선거가 치러지지 못했다. 1948년 8월 15일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의 최대 외교 과제는 9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릴 제3차 유엔총회에서 정식 국가로 승인받는 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장면·장기영·전규홍·김활란·모윤숙으로 대표단을 구성해 파견하는 한편 조병옥·정일형·김우평·김준구로 이뤄진 대통령 특사단을 별도로 보냈다. 장면 대표단장은 각국 대표단을 만나 유창한 영어로 설득했으며, 천주교인임을 내세워 교황청에도 협조를 요청했다. 당시 주불 교황청 대사이던 교황 요한 23세와 교황청 국무원장 서리를 맡고 있던 교황 바오로 6세는 한국 대표단을 적극 지원했다. UNTCOK는 "총선에서 전체 한국인의 3분의 2가 자유롭고 정당하게 의사 표시를 했으며 한국 정부는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그래도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이라는 긴급 현안에 밀려 9월 21일 총회가 개막한 지 두 달이 넘도록 한국 문제는 논의조차 못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다음 총회로 미뤄질 형편이었다. 10월 19일과 11월 3일에는 각각 여수 육군 14연대 반란 사건과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는 김구의 담화가 외신으로 전해져 대표단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한국 승인안은 총회 마지막 주인 12월 6일 정치위원회에 간신히 올려졌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북한 대표도 초청하자는 안건을 냈고 장제스 국민당 정부가 이끄는 중국은 한국 대표단의 참석을 허용하자고 제안했다. 표결 결과 체코슬로바키아의 안은 부결되고 중국 안은 채택됐다. 박헌영·홍명희 등 북한 대표단은 체코 프라하에서 3개월 가까이 대기하다가 귀국했다. 방청석에 있던 한국 대표단은 투표권은 없지만 회의장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공산권 대표들의 필리버스터에도 불구하고 정치위는 8일 한국 승인 결의안을 찬성 41표, 기권 6표로 통과시켰다. 총회 마지막 날인 12일 상정된 결의안은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라는 압도적 지지로 가결됐다. 장면 단장은 여세를 몰아 이튿날 유엔 회원국 가입을 신청했으나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부결됐다. 결의안 통과 후 1949년 1월 1일 미국을 시작으로 중국, 영국, 프랑스, 필리핀 등이 차례로 한국을 승인했다. 장면 단장은 귀국길에 미국 뉴욕에 들렀다가 초대 주미대사 임명을 통보받고 3월 25일 헨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한국 승인 1년 반 만에 6·25가 발발하자 유엔은 즉각 안보리를 열어 북한군 철수 결의안을 채택했다가 북한이 이를 무시하자 이틀 뒤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파병안을 결정했다. 7월 8일 초대 유엔군사령관에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 극동사령관이 임명됐고 7월 24일 일본 도쿄에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됐다. 미국 등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은 한국전에서 숱한 희생을 치렀고 부산에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유엔기념공원)가 있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1953년 7월 27일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와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유엔사는 1957년 7월 1일 서울로 옮겨왔다.

유엔은 1950년 10월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와 11월 유엔한국재건단(UNKRA)을 설치해 복구사업을 펼쳤다. 인천판유리공장·문경시멘트공장·국립의료원 등이 UNKRA 도움으로 세워졌다. 유엔아동기금(UNICEF)과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등 유엔 산하 기구들도 긴급구호와 원조에 나섰다. UNESCO는 대한문교서적 인쇄공장을 지어줬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유네스코 기증' 문구가 찍힌 교과서로 공부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유엔은 1975년 9월 총회에서 북한이 제출한 유엔사 해체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북한이 그해 8월 비동맹 회원국으로 가입하자 비동맹국가들이 대거 북한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 결정에 반발해 유엔 데이를 공휴일에서 제외했다. 이에 따라 유엔사는 1978년 창설된 한미연합사령부에 전투사령부 기능을 넘기고 군사정전위 가동, 중립국 감독위원회 운영,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경비대대 파견, 비무장지대(DMZ) 경계초소 운영 등만 맡고 있다.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은 1991년 9월 24일 이뤄졌다. 한국 대표단의 자리가 옵서버석에서 회원국 의석으로 옮겨오는 데 43년이나 걸린 것이다. 동독과 서독은 1973년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가 17년 만에 통일을 이뤄 두 의석이 하나로 합쳐졌다. 남북한은 27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분단 상태에 놓여 있다.


이제 한국은 원조 수혜국에서 원조 공여국으로 탈바꿈한 유일한 나라가 됐다. 1999년 10월 동티모르를 시작으로 유엔평화유지군에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2006년에는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유엔이 70년 전 한국을 승인한 것에 보람을 느낄 만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은 북한의 유엔사 해체 요구에 전전긍긍하고, 대북 지원이 유엔 안보리 제재안에 저촉되지 않는지 눈치를 살펴야 한다. 70년 전 포스터의 문구처럼 '당당한 대한민국'이 될 날은 언제일까.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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