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주영 기자 = 정부가 바뀔 때마다 단골로 내놓는 과학기술정책이 있다. '연구자가 자율적으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안정적 연구환경을 조성한다'는 게 그것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그동안 국가 연구개발(R&D) 현장에서 이런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도입해 왔다.
연구성과 평가제도를 'NSC'로 불리는 '네이처·사이언스·셀' 등 소위 영향력지수(IF) 높은 학술지에 발표하는 논문의 양을 수치화하는 정량평가 대신 정성평가로 전환하고, 연구비 정산에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게 하는 '종이영수증 붙이기'를 없애기로 한 것도 현장에서 크게 환영받았다.
그럼 연구현장은 얼마나 변했을까. 연구자들은 이런 노력에 대해 어떻게 느낄까. 안타깝게도 많은 현장 연구자가 "과학기술정책이 오히려 거꾸로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답한다.
그 이유는 과학기술인들이 "정부가 추진하겠다고 천명한 과학기술정책들이 현장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기술인들이 이처럼 느끼는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정권 교체기마다 반복되는 정부출연연구기관 기관장 사퇴 문제다.
안정적 연구환경 조성을 위한 중요 요소로 꼽히는 게 출연연 기관장 임기보장이다. 과학기술정책 토론회 등에서는 기관장이 10년 이상 재임하며 획기적인 연구성과를 내는 외국 유명 연구기관 사례가 자주 등장한다.
물론 기관장 임기보장이나 재임, 3연임을 가능하게 해 안정적인 연구성과를 내게 하는 것은 적임자를 기관장으로 임명하는 시스템과 업무실적을 제대로 평가하는 시스템이 먼저 갖춰져야 가능한 일이다. 기관장의 임기를 무조건 보장하라는 것도 물론 아니다. 재임 기간에 비위 등이 있으면 즉각 물러나게 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최근 과기정통부가 업무상 배임·횡령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이사회에 직무정지를 요구한 신성철 총장 문제는 여러 면에서 과학기술계의 공감을 얻지 못했고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많은 문제점이 보인다.
과기정통부는 신성철 총장 감사에 대해 '표적감사 또는 정치적 의도'를 강력히 부인하지만 감사와 후속조치 과정에서 순수한 감사 행위로 보기 어려운 행태를 드러냈다.
최종 감사보고서조차 나오기도 전에 여야 국회의원실을 찾아가 감사 내용을 브리핑했고, 그 자료가 언론으로 흘러 들어갔다. 신 총장은 '소명을 하면 모든 의혹이 풀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가 언론보도를 통해 자신이 검찰에 고발됐음을 알게 됐다고 한다.
KAIST 이사회가 '신성철 총장 직무정지 요구안'에 대한 결정을 유보한 뒤 과기정통부가 내놓은 입장문 역시 경솔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과기정통부는 입장문에서 "신성철 총장이 이번 사안의 본질을 왜곡하고 국제문제로 비화시킨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앞으로 이 같은 행동을 자제하기 바란다. 향후 교육자로서 검찰 수사에 성실히 임하고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고 훈계했다.
하지만 애초 '신성철 총장이 한국연구재단(NSF) 및 미국 로런스버클리국립연구소(LBNL)와 각기 다른 협약을 체결해 국가연구비를 LBNL로 빼돌렸다'고 주장해 이 사안을 국제문제로 비화시키고, 이런 주장을 하면서도 LBNL에 엄밀한 사실확인을 하지 않은 것은 바로 과기정통부였다.
신성철 총장 사태에 대해 연구자들이 보인 반응에서는 '신성철 총장 같은 한국의 대표적인 연구자를 저렇게 여론 재판으로 내몰 수 있나'라는 분노와 함께 '과학기술계의 자존심이 짓밟혔다'는 자괴감이 느껴진다.
과학기술계의 이런 반응에는 이에 앞서 하재주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 원장이 지난달 석연치 않은 이유로 물러난 것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 전 원장은 자진 사퇴 형식으로 물러났지만 이임사에서 '자의냐 타의냐는 중요치 않다', '자의든 타의든 사임을 하니'라며 자의가 아님을 강하게 암시했다.
하 전 원장은 출연연 관리·감독기관인 국가과학기술연구회의 원광연 이사장조차 "그분(하 전 원장)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은 100% 인정한다. 원자력계 내에 상당한 신망을, 특히 젊은 연구자들로부터 신뢰를 얻고 있는 분"이라고 높이 평가하는 연구자여서 진짜 사임 배경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왜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일까. 과학계에서는 정부를 포함한 정치권에 과학을 경제·산업 발전의 도구로 여기고 출연연도 정권의 단기적 성과에 기여해야 하는 기관이라고 생각하는 후진적 인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아무리 좋은 과학기술정책을 내놓아도 과학기술계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연구현장의 신뢰를 얻지 못한 정책이 성공을 거두기를 기대하는 것 역시 어렵다.
과기정통부는 좋은 정책 만들기뿐 아니라 연구현장에서 신뢰를 얻기 위한 소통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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