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소환] '블랙리스트 의혹' 22개월 만에 前사법수장 검찰에

입력 2019-01-11 05:00   수정 2019-01-11 07:17

[양승태 소환] '블랙리스트 의혹' 22개월 만에 前사법수장 검찰에
부실조사 논란에 일선 판사들 반발…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후 재조사 개시
'사법농단' 정황 확인되자 검찰 수사 본격화…양승태 소환으로 정점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2017년 3월 '법원행정처가 특정 학술단체 소속 법관들을 사찰했다'는 한 판사의 용기 있는 고백은 22개월 뒤 사상 초유의 전직 대법원장 검찰 소환으로 이어졌다.
법원행정처가 권한을 남용했다는 일련의 의혹을 밝히기 위해 지난 2년여 동안 법원의 자체 조사와 검찰 수사가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사법부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엘리트 법조인들로 구성된 사법부 조직이 감시의 사각지대에서 불법을 저지른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비리의 정점으로 지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사법부 수장이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결국 피의자로 전락해 검찰 조사를 받게 됐다.

'사법농단 의혹 정점' 양승태 전 대법원장 11일 피의자 소환/ 연합뉴스 (Yonhapnews)
◇ 시늉만 낸 법원 1차 조사…양승태, 재조사 거부로 갈등 확산
이 사건은 2017년 2월 20일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기획2심의관으로 발령된 이탄희 판사가 원소속인 수원지법으로 복귀하면서 시작됐다. 발령이 취소된 배경이 석연치 않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당시 이 판사는 양승태 대법원장이 추진한 상고법원 도입에 비판적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열기로 한 학술대회를 견제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이를 따르지 않자 행정처 발령이 취소되고 원소속으로 돌아가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의혹이 수그러들지 않자 양 대법원장은 이인복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한 진상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진상파악에 나섰다. 그해 3월 24일부터 4월 18일까지 조사를 벌인 진상조사위는 "법원행정처 간부가 국제인권법연구회 학술대회를 부당하게 견제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법원이 판사들의 성향과 동향을 파악한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는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젊은 판사들을 중심으로 진상조사위의 조사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발이 거세졌다. 급기야 각급 법원 대표 판사들로 구성된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사상 최초로 구성돼 재조사를 요청했다.
하지만 더는 논란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양 대법원장은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른바 소장판사들과 대법원장의 갈등이 본격화됐다.

◇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드러난 '사법농단' 실체
해법을 찾지 못한 채 갈등만 깊어지던 사법부 내부 분위기는 문재인 대통령이 그해 8월 후임 대법원장으로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인 김명수 당시 춘천지법원장을 지명하면서 새 국면을 맞았다.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 등에서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한 재조사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던 김 대법원장은 취임 두 달 만인 2017년 11월 민중기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위원장으로 한 추가조사위원회를 발족했다.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한 2차 조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듬해 1월 22일까지 조사를 이어간 추가조사위는 법원행정처가 특정 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한 것은 물론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 등에 부당하게 관여한 정황이 담긴 문건까지 발견했다. 양승태 사법부가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와 의사연락을 하면서 특정 재판에 개입한 의혹이 새로 불거졌다.
추가조사위의 조사결과에 여론은 들끓었고, 법원행정처와 관련된 모든 의혹을 조사해야 한다는 지적이 빗발쳤다.



결국 김 대법원장은 추가조사위 결과가 나온 뒤 한 달 만에 3번째 법원 자체 조사를 담당할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을 새로 구성했다.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의 지휘 하에 2018년 5월 25일까지 조사를 한 특별조사단의 조사결과로 법원행정처의 광범위한 사법행정권 남용행위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특정학술단체의 활동에 부당하게 개입한 것은 물론, 각급법원 판사들의 자치활동까지도 가리지 않고 사찰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특정법관의 성향을 파악해 대응책을 마련하고, 대법원 판결에 어긋난 하급심 판결을 내린 법관을 징계하는 방안까지 검토된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박근혜 정부와 거래하려는 의도로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사건 등 각종 재판에 부당하게 관여하려 했던 정황이 각종 문건에서 드러난 사실이었다.
공정한 재판을 강조했던 사법부가 실상은 조직 논리를 앞세워 사법부 윗선의 자의적인 판단을 토대로 재판을 좌지우지하려고 계획한 정황이 확인되면서 사법부는 전례 없는 위기를 맞았다. 사법행정권을 남용했다는 일련의 의혹에는 '재판거래', '사법농단' 등의 오명이 붙었다.
결국 김 대법원장은 5월 31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뒤, 6월 15일에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와 관련해 "사법행정의 영역에서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년이 넘는 기간에 법원의 '셀프 조사'로만 진행됐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진실 규명 작업은 강제수사 권한을 쥔 검찰의 손으로 넘어갔다.



◇ 검찰수사 본격화…양승태 소환으로 정점
검찰 수사는 전광석화처럼 진행됐다. 김 대법원장의 수사협조 발언 3일 만에 시민단체들의 고발로 여러 부서에 분산 배당됐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에 재배당했다.
다음날인 6월 19일 검찰은 의혹 연루자들의 하드디스크 등 자료를 제출해달라고 요청했고, 법원은 6월 26일 특별조사단이 확보한 인적·물적 자료를 포함한 자료 등을 검찰에 제출했다.
자료를 확보한 검찰은 하창우 전 대한변협회장 등 피해자들을 불러 조사하는 등 본격적인 사실 규명에 나섰다.
수사 개시 한 달 만인 7월 21일 의혹의 핵심 인물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이어 전직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 등 법원행정처 출신 판사들을 연이어 소환조사했고, 8월 14일에는 강제징용 소송을 두고 사법부와 '재판거래'를 했다는 의혹을 받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불러 조사했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 자택과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여 '윗선'의 개입 여부도 확인하려 했지만, 법원이 잇따라 영장을 기각하면서 수사가 답보상태에 빠지는 듯했다.
10월 15일 임종헌 전 차장을 소환해 조사한 검찰은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법원은 10월 27일 사건 연루자 가운데 처음으로 임 전 차장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임 전 차장의 신병을 확보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검찰은 11월 6일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검토' 문건 등 접근이 좀처럼 쉽지 않았던 법관 인사자료를 일부 압수수색해 확보했다.
11월 14일 임 전 차장을 구속기소 한 검찰은 11월 19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 11월 23일 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 등 핵심 의혹 연루자를 잇달아 소환해 조사했다.


그리고 12월 3일 양 전 대법원장을 겨냥한 수사를 본격화하기에 앞서 박병대·고영한 두 전직 법원행정처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법원에 청구했다.
하지만 법원은 12월 7일 '도주나 증거인멸 등의 우려가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영장을 기각했다.
이후 약 한 달 동안 절치부심하던 검찰은 보강 수사를 거쳐 11일 사상 처음으로 전직 대법원장을 소환해 조사하게 됐다.
hyu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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