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압 특공대 故김남훈 경사 부친 "10년이 지나도 아들 생각에 눈물"
숨진 철거민 유족 "철거민도 진압경찰도 피해자…모두 벼랑끝에 몰렸던 것"
(서울=연합뉴스) 최평천 김철선 기자 = 철거민과 경찰관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용산 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남겨진 유가족들에게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았다.
10년 전인 2009년 1월 20일 서울 용산구 남일당 빌딩에서 재개발 사업 관련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농성 중인 철거민들을 경찰특공대가 진압했다. 진압 과정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원 1명이 사망했다.
희생자 중 유일한 경찰관이었던 김남훈 경사의 아버지 김찬권씨는 13일 연합뉴스 통화에서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힘든 것은 마찬가지"라며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아들이 행방불명됐다는 전화를 받은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김씨는 "대원들이 다 투입됐는데 우리 아들 1명만 행방불명이 됐을까 싶었다"며 "안에 갇혀서 못 나온 것이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처음에는 다 원망했다. (시위했던) 그분들과 진압을 지시한 경찰 상관을 원망했다"며 "하지만 철거민들도, 경찰도 다 똑같은 국민이고 피해자"라고 힘줘 말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화염병까지 있는 시위 상황에서 경찰이 진압을 안 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라며 "그래도 '진압을 안전하게 했었으면'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명절 때 가족이 모이면 빈자리가 느껴져 더 허전하다". 10년이 됐다고 해서 눈물이 안 나는 것이 아니다. 요즘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씨는 용산 참사로 아들은 목숨을 잃었지만, 이후 시위문화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아들이 대견하다고도 했다.
김씨는 "'왜 하필 내 자식이냐'는 생각도 든다. 자식이 희생되면 모든 부모는 가슴이 아프다"면서 "용산 참사를 마지막으로 시위문화도 바뀐 것 같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10년간 슬픔을 견뎌오며 살아왔던 것은 김씨만이 아니었다. 용산 참사 당시 숨진 철거민들의 유가족들도 그때 기억은 악몽과도 같았다.
숨진 철거민의 아내 김영덕(63)씨는 2009년 1월이 오늘 일 같이 생생히 기억난다고 했다.
그는 "그날 새벽 철거대책위 관계자와 전화 통화 중 '망루에 불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현장에 도착하니 망루에서 흰 천으로 덮인 들것이 나왔다. 이후 경찰에서 시신을 찾아가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용산 참사 때 숨진 경찰의 유족도 만났지만, 서로 인사할 처지가 아니라고 말했다"며 "지금도 길에서 경찰을 보면 머리가 아프다. 여전히 경찰만 보면 머리카락이 선다"고 토로했다.
용산 참사 당시 용산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이충연(46)씨 역시 용산 참사로 부친을 잃었다. 그는 부친과 함께 현장에 있었다.
이씨는 "망루 위에 있었는데 망루에 불이 나고 밖으로 떨어졌다. 눈을 떠보니 병원 중환자실이었다"며 "그날 저녁 아내가 면회 와서 아버지와 동지들이 안 보인다고 말해줬다"고 떠올렸다.
그는 "사고 직후에는 잠만 자면 누구에게 쫓기는 꿈을 매일 꿨다"며 "매년 1월이 되면 여전히 잠을 못 자고, TV에서 불이 나는 장면만 나와도 볼 수가 없다"고 힘들어했다.
이씨는 당시 진압을 했던 경찰들이 처음에는 미웠지만, 그들 역시 자신과 같은 피해자인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씨는 "직장인인 현장 경찰들이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숨진 경찰관의 아버지 역시 자식을 잃은 입장이다. 이해된다"고 말했다.
이어 "옛날 광주 민주화 운동 때와 비슷하다. 군 수뇌부는 총을 쏘라고 했고, 시민들과 군인이 서로 벼랑 끝에 몰린 것"이라며 "용산 참사 진압 경찰들 역시 우리와 같이 벼랑 끝에 몰렸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대해서는 "진압 잘못은 인정됐는데 처벌받은 사람은 없다. 죽은 사람이 6명인데 죄를 묻지도 않고 사죄도 없는 것을 보면 허망하다"고 착잡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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