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는 같이 안가요?"…눈물로 끝난 北선수들의 베를린 한 달

입력 2019-01-23 07:59   수정 2019-01-23 17:39

"누나는 같이 안가요?"…눈물로 끝난 北선수들의 베를린 한 달
남북, 서로를 향한 '작은 발걸음'…선수들, 라면 야식·꿀밤내기
獨의 집중조명으로 한반도 외교관役… 이별 며칠 앞두고 '곧 헤어지네'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누나는 공항까지 같이 안 가나요?"
21일(현지시간) 오전 4시 30분께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 인근의 한 호텔 로비.
독일 베를린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남자핸드볼 세계선수권대회에 남북단일팀으로 출전한 북한 선수들 4명이 대회를 마감하고 귀국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북측 선수 리경송(22)은 배웅하러 나온 남측 코치진 및 지원팀에게 좀처럼 등을 돌리지 못했다.
남북단일팀의 매니저 백재은(29) 씨가 손을 흔드는 가운데, 버스에 탄 리경송은 눈물을 훔쳤다.
주변의 한 남측 인사는 리경송이 백 씨에게 한 작별 인사를 "북한에 같이 안 가냐"는 농담으로 잘못 듣기도 했다.
리경송이 그렇게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이별의 아쉬움이 깊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번 단일팀은 우리나라에서 별다른 조명을 받지 못했다. 비인기 종목이기도 한데다, 경기가 우리나라의 새벽 시간대에 열렸다.


지난 22일 남북 선수들이 상견례를 하고 첫 훈련을 할 때 취재진도 베를린에 특파원을 둔 연합뉴스와 KBS뿐이었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애초 대회 기간 방문해 남북한 공동응원전에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오지 않았다. 마침 체육계에 폭행·성폭력 파문이 터진 시점이었다.
특히 남북 선수들은 우리나라에서 연습하지 못하고 베를린에서 만나 손발을 맞춰 미디어의 관심권에서 떨어져 있었다.
애초 대한핸드볼협회는 충북 진천의 핸드볼 전용훈련장을 훈련지로 생각했으나,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협회는 선수단의 컨디션 조절과 국내 언론 노출 등을 통한 '흥행'을 고려해 진천을 최적지로 여겼다.
그러나 한반도 정세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이 사실상 어려워지고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북측이 판문점을 통해 선수들을 내려보내는 이벤트를 연출하기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탓에 선수단은 베를린에서 장기간을 보내게 됐다.
장기간 해외 합숙훈련은 선수단을 지치게 하는 부정적 요인이었지만 뜻 밖에 장점도 있었다. 숙소가 도심에 있었다.


가끔 찾아오는 휴식일에 남북 선수들은 함께 인근 레스토랑이나 커피숍에 가기가 편했다. 서로 알아갈 기회가 많아진 것이다.
훈련장이 진천이었으면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자연스럽게 밖에서 어울리기 어려울 법했다.
합숙 일주일 정도 지나 주장인 정수영(34)은 일부 북한 선수들을 데리고 나가 레스토랑에서 한턱을 냈다.
지난 1일 훈련 기간 숙소에서 만난 정수영은 "어색한 느낌은 하루 이틀 정도였다"면서 "시간이 조금 지나니 먼저 와서 장난을 치더라"고 말했다.
고참 선수들은 훈련하면서 남북 간 쓰는 핸드볼 용어가 달라 북측 선수들이 어리둥절하면 찬찬히 설명해주며 맞춰나갔다.
자연스럽게 선수들은 남북의 경계를 넘어 어울리게 됐다. 호텔 방에서 옹기종기 모여, 라면 야식을 먹는 것은 다반사였다. 같은 조 팀들의 경기 결과에 대해 '꿀밤' 내기를 하는 등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주독 북한대사관이 선수단에 전달한 김치김밥도 오손도손 나눠먹었다.
털털한 성격의 백 씨는 북측 선수들의 장난의 '표적'이었다. 단일팀의 막내인 북측 선수 박정건(19) 등은 백 씨를 '이모'라고 부르며 놀렸다. 이들은 "모자를 쓰니 더 못생겼다", "(음식을) 많이도 먹는다"라고 말한 뒤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베를린의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뒤 순위결정전이 열리는 코펜하겐으로 이동하면서 선수단 분위기가 가라앉았단다. 사흘 후면 이별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백 씨는 전화통화에서 "그때 남북 선수들이 모두 '곧 헤어지네'라는 말을 많이 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헤어지기 전 서로 증표를 나눈 남북 선수들도 있었다.
특히, 베를린에서의 한 달간 단일팀 선수들은 독일 등 유럽지역에서 한반도의 외교관 역할을 했다.
단일팀은 국내와 달리 독일에선 상당히 주목을 받았다.
남자핸드볼 세계 랭킹에서 한국은 19위다. 그러나, 현지 미디어의 관심만큼은 개최국인 독일 팀을 뛰어넘는 듯했다.
장벽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갈렸던 분단의 상징이자,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 아직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남북한의 단일팀이 찾았기 때문이다.
동서독도 어렵사리 동서독 교류·협력을 이루면서 숱하게 단일팀을 구성해 국제대회에 나간 경험이 있다.


독일이 개막전 상대로 단일팀을 고른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단일팀이 훈련에 돌입한 지 얼마 안 돼 독일 매체들의 훈련 취재 문의가 쏟아졌다.
이에 마련된 공개훈련에는 공영방송 ARD와 유력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 등 20여 개의 매체가 찾았다.
'정치적인 꿈보다 앞서가는 남북한 스포츠 교류'(쥐트도이체차이퉁), '남북단일팀 출전으로 다시 한번 통일의 현장이 된 베를린'(베를리너 차이퉁), '핸드볼팀 코리아, 경계 없는 우정'(베를리너 모르겐포스트)과 같은 현지 언론의 기사 제목에도 이런 시각이 여실히 나타난다.
한반도 문제에 깐깐한 시각을 가진 독일 언론으로선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도 개막전을 앞두고 성명까지 내고 "우리 모두에게 주는 희망의 상징"이라면서 "베를린에서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강한 신호를 보낼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밝혔다.
단일팀이 더욱 시선을 끌자 정범구 주독 한국대사에게도 단일팀의 의미와 한반도 상황을 묻는 현지 언론의 인터뷰들이 쏟아졌다.
베를린의 남북 교민들도 경기장에서 공동응원단으로 한데 앉아 응원하는 기회를 가졌다.
북측 응원단은 대부분 북한대사관 직원과 그 가족이었다.
개막전에서 만난 북한 청소년들은 스스럼이 없었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보였다.
남측 교민들과 섞여 한반도기를 흔들었다.


베를린은 냉전 시절 서구권과 동구권의 정보기관들이 치열한 첩보전을 벌였던 곳이다.
지금도 유럽에선 첩보전이 가장 활발한 곳 중 하나다. 특히 독일 분단기에 북측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남북이 치열한 정보 대결을 벌였음은 당연하다. 교민 사회도 제법 형성돼 있다. 박정희 정권 당시 중앙정보부가 왜곡·과장한 간첩단 사건인 '동백림(東伯林·East Berlin) 사건'의 피해자들도 베를린에 거주하던 인사들이 중심이었다.
독일 넷플릭스에서는 베를린에서의 첩보전을 둘러싼 TV 시리즈 '베를린 스테이션'이 인기 콘텐츠이기도 하다. 베를린에서의 정보전쟁이 개연성 있게 받아들여 진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치열할 수 있는 배경은 접촉과 접근 가능성이 클 수 있는 배경도 된다.
베를린에선 가끔 한반도보다 반 박자 빠르게 남북 간 교류·접촉이 이뤄지기도 한다.
지난해 한반도에선 6·15 선언 공동행사가 무산됐지만, 베를린에선 남과 북이 한데 어우러졌다.
남측이 주최한 행사에 박남영 주독 북한대사가 참석했고 북한대사관 직원 자녀 6명으로 이뤄진 합창단이 연단에 올라 행사장의 분위기를 한껏 달궜다. 사실상 공동행사가 이뤄진 것이었다.


한 달간의 베를린 여정이 끝나고 남과 북의 선수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북측 선수들은 베를린 테겔 공항에 도착했을 때처럼 검은 양복과 코트를 입고 출국길에 올랐다.
허재영 대한핸드볼협회 사업홍보팀장은 처음 만났을 때와 헤어질 때 이 정장에 대한 느낌이 달랐다고 한다.
허 팀장은 "복장에서 딱딱한 느낌이 들고 선수들의 표정은 긴장돼 있었다. '이들을 카메라로 기록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면서 "그런데 헤어질 때는 이 정장 입은 모습이 달라 보였다. 딱딱함의 느낌은 어느 순간에 사라져 있었다"고 말했다.
남측 선수들은 22일 귀국했다. 21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 향한 북측 선수들도 22일에는 도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한 달간 한반도와 8천500㎞ 떨어진 곳이자, 독일 분단기 동서독 간 교류·협력 정책의 핵심지역이었던 베를린에서 남과 북이 서로를 향해 '작은 발걸음'(kleinen Schritte·신동방정책 설계자인 에곤 바가 쓰던 표현)을 내딛도록 했다.
남북의 선수 20명은 베를린에서 '접근을 통한 변화'(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신동방정책 기조·Wandel durch Annaeherung)가 조금씩 이뤄지도록 한 주인공들이었다.


lkbi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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