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취임 후 수직적 관료체제 강화…상고법원 도입 강행이 발단
판사사찰·재판개입 불사…이탄희 판사 행정처 심의관 발령취소로 수면 위로
[※ 편집자 주 = 사법부 수장을 지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재판거래' 등 혐의로 구속된 데 이어 곧 재판에 넘겨집니다. 사법 사상 초유의 일로, 법원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치욕이자 신뢰도에 치명적 타격을 입은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대법원의 권위를 높이고 대법원장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상고법원 추진에서 비롯된 '사법농단 사태'는 2년 전 '법관 블랙리스트' 사건을 계기로 추악한 민낯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연합뉴스는 검찰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 마무리를 앞두고 이번 사태의 발단과 경과, 시사점, 사법개혁 전망 등을 담은 기사를 3∼6일 4차례에 걸쳐 송고합니다.]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지난 2년 동안 사법부를 초유의 위기로 내몬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태는 대법원장이 제왕적 권한을 누리는 기존 체제를 고수하려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과욕이 부른 참사라는 평가가 나온다.
권위주의 정부가 물러난 이후로 사법부에도 점진적인 변화가 있었다. 국민의 사법 참여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았고, 일선 법관들이 사법행정에 목소리를 낼 기회도 늘었다.
그만큼 대법원장과 사법행정기구인 법원행정처는 점점 더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했다. 이런 변화는 종종 사법부 내부에 파열음을 냈다.
사법연수원 기수나 서열에 따라 대법관 후보를 임명제청하는 데 대한 일선 판사들의 반발이 드셌던 2003년 '대법관 임명제청 파동', 2009년 촛불집회 관련 재판에 당시 서울중앙지법원장이었던 신영철 전 대법관이 부당하게 개입하면서 일선 법관들이 강하게 문제제기를 했던 사례 등이 대표적이다. 두 사안 모두 진보·개혁 성향의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가 문제제기를 주도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2003년에는 법원행정처장으로, 2009년에는 대법관으로 재직하면서 이처럼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권위가 흔들리고 내부 비판에 직면하는 광경을 바라봤다. 대법원 판결에 어긋나는 소위 '튀는 판결'이 일선 법원에서 내려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2011년 대법원장에 오른 양 전 대법원장은 '탈권위'냐 '기득권 회복'이냐의 선택지를 두고, 후자를 택한 것으로 평가된다. 일사불란한 수직적 조직을 복원하는 방향으로 사법정책을 추진해 나갔다는 것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2014년 6월 '상고법원' 도입안을 꺼내 놓았다.
2심 재판부의 선고에 불복해 상고한 재판을 대법원이 아닌 상고법원이 맡도록 한 이 방안은 초기에는 상고심 사건의 적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상고법원의 판결에 대해서는 대법원 판례 위반에 해당하는 경우 등에만 특별히 불복할 수 있도록 제한했기 때문에 대법원 사건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안이었다.
법원이 허가한 경우에만 상고가 가능하도록 한 '상고허가제'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결정을 받은 상황에서 상고법원 도입안은 상고심 제도개선을 위한 유일한 방법처럼 여겨졌다.
문제는 제도 도입의 숨은 의도였다. 우리법연구회 출신 판사들과 법원 내부 학술단체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 판사들 사이에서 상고법원 도입안이 대법원장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꼼수'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기존 3심 체제에 상고법원을 더한 '1심→항소심→상고법원→대법원'의 4심 체제를 구성해 대법원의 권위를 높이고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한 수직적 사법체계를 구축하려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대법원 사건을 줄이기 위한 또 다른 대안이었던 '대법관 수 증원'이 자칫 대법원의 권위 추락과 대법원장 권한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 상고법원 도입안을 급하게 추진한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가장 핵심을 찌른 지적은 상고법원 도입이 이른바 '법관 인사의 꽃'이라 불렸던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늘려 법원 내부의 인사불만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대법원장의 인사권한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판사로 정년퇴직하는 '평생법관제'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에서 탈락해 인사불만을 갖는 판사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상고법원 판사라는 새로운 승진통로를 마련해 판사들의 '인사 갈증'을 달래주고, 대법원장의 인사권도 확대하는 취지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지적이 법조계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얻으면서 상고법원 도입은 쉽지 않은 문제가 됐다. 법원 내부는 물론 변호사단체인 대한변호사협회에서 공식적인 반대 입장을 밝혔다. 변협은 대법관 수 증원이라는 근본적인 해결방안을 두고 부작용이 우려되는 상고법원 도입을 강행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반발했다.
정부와 국회도 협조적이지 않았다. 상고법원 도입이 대법원장 권한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런 기류에도 불구하고 양 전 대법원장의 선택은 '강행 돌파'였다. 대외적으로는 제도 홍보를 통해 법원 밖의 반대의견을 설득해 나간다는 방침을 세웠고, 내부적으로는 상고법원에 반대하는 판사들을 회유하거나 때로는 겁박했다.
상고법원 반대의견을 주도하는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들에 대한 '관리'에도 나섰다. 차성안 판사 등 반대의견을 공식적으로 내놓은 판사들을 뒷조사하고 인사를 빌미로 회유하는 일들이 이어졌다.
정부와 국회 설득 작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과 강제징용 손해배상 재판 등 박근혜 정부가 부담스러워 하는 사건을 대(對) 정부 협상카드로 이용했다. 상고법원 법안 통과에 결정적 역할을 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들을 상대로도 전방위적인 설득에 들어갔다.
양 전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하는 법원행정처가 일선 법원의 재판을 움직일 수 있는 듯한 인상만 줘도, 이는 강력한 흥정수단이 될 수 있었다. 그만큼 정부와 국회가 큰 관심을 두고 있거나 이해관계가 걸린 재판이 많았기 때문이다.
법관들을 뒷조사하거나 정부 등과의 흥정을 위해 필요한 전략을 가다듬는 작업, 나아가 실제로 '거래 대상'으로 꼽힌 재판에 관여하는 일에 법원행정처 소속 판사들이 동원됐다. 법관과 재판의 독립을 저해하는 만큼 부당하고 반(反) 헌법적인 일이었지만, 전국에서 선별된 법원행정처 소속 판사들은 충성심을 갖고 일을 '수행'했다.
업무 능력을 발휘한 법원행정처 판사들에게는 인사가 보상처럼 뒤따랐다. 이규진 서울고법 부장판사처럼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까지 지낸 판사도 부당한 일을 수행하는 데 예외가 아니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채 은밀하게 진행되던 법관 사찰과 재판거래 의혹은 결국 수면 위로 드러났다. 2017년 2월 20일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기획2심의관으로 발령된 이탄희 판사가 원소속인 수원지법으로 복귀한 일이 그 발단이었다.
발령이 취소된 배경이 석연치 않다는 의혹이 불거졌고, 국제인권법연구회에 대한 부당한 탄압이 원인이라는 지적이 법원 내부에서 쏟아졌다. 상고법원에 반대하는 판사들에 대한 사찰이 진행되고 있었고, 이 결과가 인사에 반영됐다는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이 의혹을 밝히기 위한 법원의 자체 조사와 검찰 수사가 2년 동안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양승태 사법부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결국 비리의 정점으로 지목된 양 전 대법원장은 '무소불위'의 사법부 수장이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구속 피의자로 전락해 재판에 넘겨질 신세가 됐다.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은 고도로 수직·관료화된 사법부의 옛 체제에서 권한을 남용하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단적으로 보여줬다.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 전국법관대표회의와 법원장추천제 등 수평적 구조의 사법부 체제가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될지 관심을 끈다.
hy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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