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체육 '국위선양' 강조해온 건 정부…체육계 책임전가는 무책임
(서울=연합뉴스) 장현구 기자 = 31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대한체육회 이사회는 최근 정부의 체육계 쇄신안을 집단으로 성토하는 장이었다.
한 참석자는 "체육계가 이렇게 단결의 목소리를 낸 건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라고 했다.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한 새 사무총장·선수촌장 선임은 설 연휴 이후로 미뤄졌다.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에서 각 종목 대표 선수들의 훈련을 책임지는 선수촌장과 체육회의 살림을 책임지는 사무총장의 인선이 이달에만 두 번째로 미뤄지면서 체육회 실무 공백은 장기화를 피하지 못했다.
체육회 이사들은 이기흥 체육회장에게 두 요직 인선을 위임하는 것으로 이사회 주요 안건을 30분 만에 마무리하고 이후 1시간 30분 동안 돌아가며 정부 대책을 비판했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25일 발표한 체육계 폭력·성폭력 비리 근절대책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도 장관은 당시 성적 지상주의에 기반을 둔 엘리트 선수 중심 스포츠 시스템을 개혁하겠다면서 대한올림픽위원회(KOC)를 대한체육회(KSOC)에서 떼어내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엘리트 국가대표 선수들의 국제대회 참가를 주로 관장하는 KOC를 분리해 독자 기구를 만들고, 체육회는 생활 체육과 국내 체육 증진에 힘쓰도록 해 균형을 맞추겠다는 취지다.
또 소년체전을 폐지하고 전국체전 고등부에 통합해 '학생체육축제'로 전환하는 한편 국제대회 우수 선수와 지도자에게 지급하는 경기력향상연금과 병역특례 제도 개선도 추진한다고 덧붙였다.
체육회 이사진, 대한체육회 노동조합, 체육회 회원종목 단체로 구성된 경기단체연합회 노동조합은 먼저 국민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체육계 병폐를 두고 참담한 심경이며 무거운 책임감을 느낌과 동시에 국민께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면서도 정부의 쇄신안이 체육계와 한마디 논의 없이 이뤄진 일방적인 결정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아울러 일부 종목에서 발생한 특정 지도자의 일탈을 마치 체육계 모두의 문제로 인식해 엘리트 체육을 비위의 온상으로 지목하는 것에도 억울함을 호소했다.
정부가 합리적인 대책을 내놓기보다 엘리트 체육인들을 쇄신의 대상으로만 삼은 것에 체육 종사자들은 마음 아파했다.
한 체육인은 "체육계 폭력·성폭행 사태에 체육인으로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면서도 "일부 종목에서 벌어진 일을 크게 확대해 열악한 환경에도 묵묵히 땀 흘린 지도자와 선수 전체를 도매금으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했다.
또 다른 종목 단체의 임원도 "정부의 비리 근절대책을 이해한다"면서도 "하지만 체육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좀 더 확실한 개선안을 마련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탁상행정을 꼬집었다.
체육회 한 관계자는 "정부의 KOC와 KSOC 분리 추진이 이기흥 회장의 사퇴를 압박하려는 수단으로 보일 뿐"이라며 "두 단체의 분리로 생기는 실익이 크게 없다"고 진단했다.
체육인들은 정치인 출신 도 장관의 '레토릭'(수사)에도 강한 거부감을 표출했다.
도 장관은 "스포츠가 국위선양에 이바지하는 것에서 벗어나 공정하게 경쟁하며, 최선을 다해 뛰고 달리고, 상대를 존중하며, 결과에 승복하는 분위기가 되도록 하겠다"며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촉구했다.
이를 두고 체육회 노조는 "그간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주요 국제대회마다 대한민국 선수단의 목표 성적과 메달 수 등 '국위선양'을 위한 전문 체육(엘리트 체육) 지표를 주도해 발표한 건 정부였다"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어 "전국권역별 인권센터 설치 필요성을 요청할 때마다 정부가 예산 문제로 주저했고, 비정규직 체육지도자 처우개선, 일반 학생들의 체육활동 확대 요구에도 정부가 침묵했다"고 공세를 이어갔다.
체육계 노조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3년 전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를 합쳐 통합 대한체육회를 설립할 때도 강압적으로 하더니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있다"며 체육회에만 책임을 떠넘기는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체육계에선 문체부가 현 사태의 책임을 체육회와 체육계에 전가할 것이 아니라 주무 부처로서 공동책임임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대책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기흥 회장은 "체육회 이사진들이 정부 쇄신안에 너무 조급해선 안 된다는 뜻을 보였다"며 "개선책을 찾아야겠지만, KOC를 KSOC에서 함부로 분리·폐지해선 안 되며 충분한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밝혔다.
cany990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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