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재 유품으로 본 1888년 조선·미국 외교 전말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이 나라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는 30여 개국으로 모두 부강한 나라이고, 오직 우리나라만 빈약하지만 각국 공사와 맞서 지지 않으려고 한다. 이때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꺾이면 국가의 수치이고 사명(使命)을 욕보이는 것이다."
1887년 주미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돼 이듬해 미국에 당도한 월남 이상재(1850∼1927)는 1888년 4월 13일 편지에서 "중국 공사는 매번 체제로 우리나라 공사의 위에 서고자 한다"면서도 외교활동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를 내비쳤다.
당시 이상재는 노론 명문가 출신으로 초대 주미전권공사라는 중책을 맡은 박정양(1841∼1905)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들은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달한 뒤 국익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청의 압력으로 채 1년도 미국에 머물지 못했다.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13일 처음으로 공개한 이상재 유품 중 '미국서간'(美國書簡)과 '미국공사왕복수록'(美國公私往復隨錄)은 약소국 조선의 외교관이 경험한 어려움이 자세하게 기록된 자료로 평가된다.
이상재가 1887년 8월 7일부터 1889년 1월 4일까지 작성한 편지 38통을 묶은 미국서간을 보면 조선과 청이 겪은 갈등이 나타난다.
그는 1888년 1월 1일 서한에서 "미국 물정은 이곳에 온 이후 언어와 문자가 모두 통하지 않아서 듣거나 아는 것이 전혀 없다"며 "중국공사가 예례 등사로 매번 트집을 잡아 정말 소위 진퇴유곡(進退維谷)의 처지"라고 곤혹스러워했다.
그해 1월 20일에는 "이곳의 인물 풍속 정치 법령은 오로지 우리나라와 일체 상반된다. 날마다 귀와 눈이 처음 듣고 처음 보는 것"이라며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중국공사가 매번 체제사로 서로 양보하지 않고 고집부리는 것"이라고 적었다.
이상재가 이렇게 중국공사의 눈치를 살피며 괴로워한 이유는 청이 조선의 외교관 미국 파견 조건으로 내건 '영약삼단' 때문이었다.
영약삼단에는 조선공사가 미국에 도착하면 먼저 중국공사를 만나고, 중요한 일을 있을 때는 중국공사와 협의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러나 박정양과 이상재는 미국에 이른 뒤 독자적 행동을 추진했다. 공관원 업무편람이라고 할 만한 자료인 138쪽 분량의 '미국공사왕복수록' 중 '송미국외부조회'(送美國外部照會)에 따르면 박정양은 중국공사에 방문하지 않고 바로 미국 국무장관을 만나고자 했다.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이 문서는 주미전권공사가 국제관례에 따라 자주국으로서 외교를 전개했음을 입증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라며 "박정양은 영약삼단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재 기간에 청의 강력한 항의와 압력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미국공사왕복수록에서 확인되는 또 다른 사실은 박정양이 참찬관 호러스 앨런의 주도와 알선으로 철도 사업을 논의했다는 점이다.
미국 뉴욕 법관 '딸능돈'은 조선기계주식회사를 설립해 경성과 인천 제물포 사이에 철로를 놓는 사업과 양수기, 가스등 설치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제안했다.
한 교수는 "이들이 경인선 건설을 제안한 사실은 학계에 알려진 적이 없다"며 "앨런은 조선 정부가 돈을 내지 않고도 경성을 번화하게 만들 기회라고 여겼지만, 박정양은 우리에게 불리한 조건이라고 판단해 거절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상재 종손이 국립고궁박물관에 기증한 자료 중에는 종전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내용이 상당히 있다"며 "기존 사료와 대조해 그 가치를 부각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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