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기의 천재들'…20년 미뤘다 공개한 '진화론'·25년만에 그린 '암굴의 성모'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1859년 출간된 '종(種)의 기원'은 인류 지성사에서 가장 위대한 저술이자 과학적 성취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 발견은 서구 사회의 종교적 신념에 흠집과 상처를 내고 인류의 세계관을 바꿔놓는 동시에 모든 학문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그런데 찰스 다윈이 관련 연구를 사실상 완성해놓고도 이를 저서로 세상에 공개하기까지 무려 20년이 걸렸다고 하면 믿기는가. 심지어 그는 아무 특별한 이유도 없이 발표 계획을 잡지 않고 다른 일에 몰두했다.
조급증에 걸린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다.
다윈은 1838년 여름 "모든 종은 변화한다"는 결론을 내고 환경은 특정 돌연변이를 선호하고 다른 돌연변이는 절멸시킨다는 이론을 기록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이러한 도태 과정에 '자연선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이상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이 이론을 논문으로 발표하지도 않고 대중 매체에 글을 싣거나 책을 쓸 생각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뜬금없이 따개비 연구에 강박적으로 오랜 시간 매달린다. 후일 다윈은 종의 기원을 발표하고서 자신도 왜 그렇게 오랫동안 꾸물거렸는지 당혹스럽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는 왜 아무 이유 없이 큰일을 미뤘을까?
저널리스트 앤드루 산텔라가 쓴 '미루기의 천재들(어크로스 펴냄)'은 이러한 '미루기의 미학'을 다룬다.
저자에 따르면 미루는 행위는 사실 게으름과 관계가 없다. 현대에 와서 미루는 습관을 나쁜 행동이나 병적 행위로 진단하고 이를 고쳐야 한다는 자기계발서도 쏟아졌지만, 저자는 오히려 미루는 습관이 있는 사람 중 천재가 많다는 점에 주목한다.
'팔방미인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림 주문을 의뢰받은 지 무려 25년 만에 세기의 명작 '암굴의 성모'를 남겼다.
행동경제학의 대가 조지 애컬로프는 무려 8달 동안 자신의 엄청난 이론을 소포로 보내는 일을 망설였고, 미국의 대표적 주택 건축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의뢰받은 주택 설계를 아홉 달이나 미루다가 고객이 오기 직전 두 시간 만에 설계를 완성한 일화로 유명하다.
시인이면서 재기 넘치는 비평으로 유명했던 도로시 파커는 초고를 내기까지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느냐는 질문에 "다른 사람이 제 연필을 쓰고 있었거든요"라고 답했다.
신문 기자들도 데드라인이 닥치기 전까진 도저히 기사를 못 쓰겠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자신을 스스로 '미루기 전문가'로 칭하는 저자는 일을 제쳐놓고 오랫동안 미루는 동안에도 우리의 뇌와 정신이 그 일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게으른 게 아니라 창의적으로 바쁘다"는 것이다.
또 일을 미루는 동안 우울감과 망상이 오는 게 사실이지만 반대로 "어떻게든 되겠지"를 되뇌는 낙관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19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 사이에 대학을 다닌 독자라면 모두 들어본 노래가 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오늘의 할 일은 내일로 미루고, 내일의 할 일은 하지 않는다.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
김하현 옮김. 240쪽. 1만3천800원.
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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