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 1분 1초가 두려운데"…얼빠진 경찰 늑장 수사

입력 2019-02-14 11:49  

"성폭력 피해자 1분 1초가 두려운데"…얼빠진 경찰 늑장 수사
성폭력 전과 2차례 남성, 집안 침입까지 인정했는데도 석방
3주 뒤 DNA 일치 확인…이후에도 8일이나 구속영장 신청
가해자는 그사이 극단적 선택…피해자, 경찰 무성의 수사에 분통



(부산=연합뉴스) 차근호 기자 = 지난달 7일 새벽 A씨는 참담한 일을 겪었다.
음주 후 택시에서 내려 친구와 택시기사, 행인 B(45)씨의 도움으로 귀가했는데 친구가 나간 뒤 주변에 몸을 숨기고 있던 B씨가 집안으로 침입했다.
B씨는 혼자 있는 A씨에게 몹쓸 짓을 한 뒤 귀가한 A씨 어머니를 피해 집 안에 숨어있다가 1시간 뒤 빠져나갔다.
A씨는 잠에서 깬 뒤에야 피해 사실을 알았다.
옷이 벗겨져 있었고, 곳곳에 흔적도 있었다.
A씨는 오후 5시 경찰에 신고한 뒤 집 앞에서 남자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또다시 소름 돋는 일을 겪었다.
웬 남성이 주차된 차량 뒤에 숨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엿들었고, A씨와 눈이 마주치자 달아났다.
A씨는 겁에 질려 112에 신고했고, 남자친구는 주변을 한참 돌다가 또 집 앞을 서성이는 이 남성을 발견하고 붙잡았다.
남성은 B씨였다.
B씨를 넘겨받은 부산 모 경찰서의 수사는 하루하루가 불안한 피해자 마음과 너무 다르게 진행됐다.

경찰은 B씨가 강간 등 성폭력 전과가 2차례 있는 것을 확인했다.
A씨 집주변에 살고 있고, A씨 집에 침입한 사실도 B씨가 인정했다.
다만 "열쇠를 놔두고 와 다시 찾으러 들어갔다"며 범행은 부인했다.
경찰은 B씨 DNA를 채취한 뒤 석방했다.
경찰은 "심정적으로는 범인이라고 생각되지만, 피해자가 범행 당시 정신을 잃은 상태라 가해자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 직접증거인 DNA 일치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는 영장 신청이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A씨는 한 달간 동안 집은 물론 동네 근처로도 가지 못했다.
경찰이 제시한 신변 보호 방안 중 집에 CCTV를 설치하는 방법을 선택했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CCTV는 설치되지 않았다.
경찰은 "A씨가 집에 없었고, 당분간 다른 곳에 피신해 있을 것이라고 해 설치를 보류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A씨는 "CCTV가 먼저 설치돼야 집에 안심하고 가는 것 아니냐"면서 "내가 없다는 이유로 CCTV 설치를 안 했다는 이유도 언론 취재로 알게 됐다"고 전했다.

경찰은 성폭행범 DNA가 일치한다는 국과수 결과를 3주 후인 지난달 30일 확보했지만, 영장 신청까지 8일이나 걸렸다.
DNA 결과를 받기 하루 전날 담당자가 발령을 받아 부서를 옮겼고, 이달 1일 새로운 담당자가 배정됐지만 사건파악을 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이 담당자는 4일 체포 영장을 신청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썼고, 설 연휴 기간이라 7일에야 결제가 이뤄졌다.
경찰은 7일 받은 영장을 나흘 뒤인 11일 집행하기 위해 B씨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B씨는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태였다.
A씨는 "1분 1초가 불안했는데, 범인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통보해 주지 않았다"면서 "수사 기간 내내 애걸복걸하듯 전화를 먼저 걸어야 했고 피의자가 죽은 것도 전화를 먼저 걸고 나서야 12일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경찰이 신속히 영장을 집행하고 수사했다면 범인도 죽지 않고 법정에 세웠을 것"이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경찰은 "설 연휴 기간 범인이 다른 지역으로 벗어날 것이 예상돼 영장 신청과 집행 시기 타이밍을 조율한 것이지 늑장을 부린 건 아니었다"면서 "피해자 마음을 세심하게 헤아리지 못한 부분을 인정하고 개선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ready@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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