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지병에 병상에서, 자택에서 힘겨운 노년 보내
(광주=연합뉴스) 박철홍 기자 = 광주 생존 애국지사 5인이 치매를 앓거나 지병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병상에서 자택에서 힘겨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
김영남(93) 씨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애국지사다.
전남 화순 출생으로 일제강점기인 1944년 억지로 끌려가 진해 해군해병대에 18세의 나이로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고된 훈련을 받던 김 지사는 "일본을 위해 싸우느니, 탈출해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가로 몸을 바치자"는 뜻을 세우고 동지 5명과 함께 탈영계획을 세웠다.
화약고와 군함에 불을 지르고 관심이 불이 난 곳에 쏠린 틈을 타 무기를 들고 도주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화약고에 불이 쉽사리 번지지 않아 김 지사는 동료들과 함께 현장에서 붙잡혔다.
진해 경비부 군법회의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은 김 지사는 일본의 사세보 형무소에 끌려가 모진 수감생활을 견뎠다.
함께 붙잡힌 5명 동지 중 2명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생을 달리했다.
김 지사는 1945년 일본의 형무소에서 광복을 맞고, 그해 10월 형집행정지로 형무소 밖으로 나왔다.
고문으로 두 다리가 성치 않아 걷지도 못하는 김 지사를 형무소 간수들은 내던지듯 형무소 밖으로 끌어냈다.
갈 곳 없이 기어 다니던 김 지사를 일본의 한 스님이 보살펴 회복을 도왔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귀국한 김 지사는 육군 종합학교 1기생으로 군에 다시 들어가 소위로 임관해 6·25 전쟁에 참전했다.
민족상잔의 전쟁에서 김 지사는 인민군에게 붙잡혀 북으로 압송되다 가까스로 도주하다 손에 총상을 입기도 했다.
김 지사는 5·16군사 쿠데타 직전 '반 박정희파'에 속해 군 생활을 더는 이어가지 못하고 1960년대에 중령으로 예편했다.
이후 3남 3녀의 자녀와 아내를 보살피기 위해 김 지사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 등을 지키는 건설회사 직원으로 한 가장의 역할을 했다.
그런 김 지사가 아흔이 훌쩍 넘긴 나이에 다시 어린아이가 됐다.
8년 전부터 치매를 앓기 시작해 점차 인지 능력 어린아이 수준으로 퇴화해 1년 전부터는 음식물을 씹는 활동도 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악화해 코로 매일 음식물을 섭취하고 있다.
갈수록 상태가 악화하는 아버지를 보며 자식들은 조용히 마지막 길을 준비하고 있다.
김 지사의 큰아들은 "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서 6·25 전쟁을 거치며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는 이야기를 어린 시절부터 자주 해줬다"며 "옛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아버지는 '후회하지 않는다. 자랑스럽다'는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하셨다"고 말했다.
김 지사와 같은 광주의 생존 애국지사는 4명이 더 있다.
일본군에 징집되어 일본 육군 제2927부대에서 항일구국 목적의 우국동지회를 조직해 건군훈장 애족장을 받은 김배길(93) 지사는 거동이 불편한 상황에서도 치매인 아내를 돌보며 자택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일제시절 신사참배의 허구성을 따지고 꾸짖어 건군훈장 애족장을 받은 이기환(95) 지사는 퇴행성 관절염 등 노환과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보훈병원에 입원 치료 중이다.
광주사범학교 재학 중 비밀결사 무등독서회를 조직, 항일민족의식 고취해 대통령 표창을 받은 노동훈(92) 지사도 노령에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에 입대하여 활동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이준수(96) 지사도 몸이 불편한 상태로 장남의 집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광주시장과 광주 북구청장은 3·1운동·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생존 애국지사들을 찾아뵙고 위문품을 전달했다.
pch8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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