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필리핀 이주여성 DJ 제니 김 "한국인 목소리 커도 마음은 따뜻"

입력 2019-02-22 08:47   수정 2019-02-22 22:16

[사람들] 필리핀 이주여성 DJ 제니 김 "한국인 목소리 커도 마음은 따뜻"
"수교 70주년 맞아 한국·필리핀 교류 역사 널리 알려지면 좋겠어요"
방송·통역에다 각종 모임에도 앞장…"정부 차원에서 코피노 지원해야"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한국항만연수원 통역사 겸 상담사, 다문화가족 음악방송 DJ, 필리핀이주여성협회 부회장, 한국문화다양성기구 이사, 서울필리핀가톨릭공동체 사무국장, 한·필 헤리티지문화교육협회 홍보대사, 세계필리핀재외동포협회 한국 대표, 대통령 직속 필리핀노동자라디오방송 한국 통신원….
제니 김(41) 씨에게 따라붙는 직함은 이것만이 아니다. 모 이주여성지원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고 한때 영어학원 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영어와 타갈로그(필리핀 토착어)로 된 인터넷 홈페이지를 3개씩 운영하며 한국살이에 익숙지 않은 초보 필리핀 이민자나 한국 이주를 준비하는 고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상담을 하고 있다. 재한 필리핀인 사이에서는 마당발이자 전천후 도우미로 통한다.
2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염리동 다문화가족 음악방송 스튜디오에서 그를 만나 인터뷰하자 여러 장의 명함을 갖게 된 동기부터 털어놓았다.
"제가 2003년 한국으로 건너와 직장에 다닐 때 한국어가 서툴러 고생했어요. 그런데 한국에 온 지 8년 된 고국 사람이 경쟁심 때문인지 몰라도 제게 잘못 통역을 해주는 거예요. 이때 상처를 받아 나중에 한국어가 능숙해지면 꼭 좋은 데 쓰겠다고 결심했죠. 그 약속을 지키려고 틈나는 대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고향인 필리핀 세부의 남부필리핀대(USP)를 다니던 제니 김 씨는 같은 대학 동아리에서 만난 한국인 유학생과 2000년 결혼했다. 2002년 아들을 낳은 뒤 이듬해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부부가 함께 매달린 사업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고, 아이를 키우기에 한국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친정 부모도 우리 결혼을 반대하셨지만 시부모의 반대가 더 심했어요. 결혼식에도 안 오셨죠. 인천국제공항에서 처음 시어머니를 뵀는데 손자가 아이 아빠를 닮았다고 좋아하시더군요. 남편과는 별거하다가 이혼했어요. 그래도 시어머니는 제가 계속 모셨죠. 남편보다 시어머니와 훨씬 오래 살았어요."
다음 달 인천 동산고에 입학하는 아들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엄마에게 학교에 오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엄마가 필리핀인이라는 사실이 친구들에게 알려지는 걸 싫어했기 때문이다. 학부모 행사에는 할머니(시어머니)가 참석하다가 제니 김 씨는 아들이 4학년 때 처음 학교에 갔다.
"저는 직장에 다니고 있어 외모를 꾸미고 간 편이었죠. 전업주부인 다른 친구 엄마들은 허름한 차림이었고요. 이를 본 아들 친구가 '너희 엄마 부자인 모양이구나'라고 하더래요. 그때부터 아들이 저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됐죠. 그래도 아빠도 없이 사춘기를 겪다 보니 고민이 많은가 봐요. 걱정하며 달래다가도 어떨 때는 '필리핀에는 사춘기 그런 거 없어'라고 말하며 마음을 다잡아주기도 합니다."
제니 김 씨는 많은 직함 가운데 다문화 방송 DJ란 직함에 가장 큰 애착을 느낀다. 아들도 지갑에 엄마의 DJ 명함을 넣어 다닐 정도로 자랑스럽게 여긴다. 웅진재단이 운영하는 다문화가족 음악방송은 올해로 11년째를 맞았는데, 제니 김 씨가 최고참 DJ다. 2013년 초에 DJ를 해보고 싶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더니 이력서를 보내라는 응답이 왔고, 서류 심사와 면접을 거쳐 채용됐다.
만 6년을 진행하다 보니 팬도 많이 생기고 애틋한 사연도 자주 받는다. 국내의 필리핀인은 물론이고 모국에 사는 친지나 다른 외국의 지인들도 잘 들었다는 안부를 수시로 전해온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필리핀 이주여성을 만났더니 '힘겨울 때마다 다문화가족 음악방송을 들으며 위안을 받는다'고 털어놓더군요. 제가 '그 진행자가 바로 나야'라고 말하자 깜짝 놀라며 반가워했습니다. 통역을 위해 경기도 광주의 사업장을 방문했는데, 사업주가 거만한 태도로 저를 대하다가 방송국 DJ 명함을 건네주니 갑자기 태도가 공손해지는 거예요. 한국에서는 언론의 힘이 세다는 걸 실감했죠.(웃음)"

오는 3월 3일은 필리핀과 한국의 수교 70주년 기념일이다. 주한필리핀대사관과 주필리핀한국대사관은 각각 기념식과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제니 김 씨는 다음 주 라울 에르난데스 주한필리핀대사를 서울 마포구 염리동의 다문화가족 음악방송 스튜디오로 초대해 생방송으로 인터뷰할 예정이다.
"저도 한국과 필리핀의 교류 역사를 잘 몰랐어요. 10년 전 수교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가 6·25 전쟁 때 필리핀이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 가운데 가장 먼저 한국에 전투병을 보내준 사실을 알게 됐죠. 그 뒤로도 양국은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지금은 한국이 잘살게 돼 필리핀이 도움을 많이 받고 있죠. 수교 70주년을 계기로 양국 관계사가 널리 알려지고 두 나라 국민이 더 가까워지기 바랍니다."
한국인 아빠에게서 버림받은 필리핀 혼혈, 즉 코피노는 감추고 싶은 한국의 치부이자 이대로 두면 양국 우호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제니 김 씨는 현재 21살짜리 코피노와 함께 살고 있다. 다행히 아빠를 찾았고 그가 자신의 딸임을 인정해 한국 국적을 얻었으나 엄마 아빠 모두 건강이 좋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코피노는 4만 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누구도 정확한 숫자를 몰라요. 코피노를 돕는 민간단체들이 있지만 장삿속으로 운영하거나 범죄 수법을 동원하는 곳도 있다고 들었어요. 코피노 아빠를 찾아가 폭로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하고, 양육비를 받아주면 얼마씩 떼기도 한다는군요. 양국 정부나 공공기관이 나서 아빠를 찾아주고 양육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를 낳았으면 당연히 부모가 함께 책임을 져야죠.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지는 한국에서는 이들을 데려와 키우는 게 도움 되는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한국에 와서 문화가 달라 가장 당황했을 때가 언제였는지 묻자 "목소리가 커서 놀랐다"고 대답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만 정작 속마음은 따뜻하다는 걸 한참 후에 알았다고 한다.
한국인들에게 충고하고 싶은 말을 들려 달라고 하자 "필리핀 사람들은 생활이 어려워도 만족하며 사는데 한국인들은 가진 게 많은데도 좀처럼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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