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겸 소설가 주지영 첫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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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은경 기자 = 소설을 쓰는 '나'는 철학을 전공한 시간강사 '권'과 불륜 관계다.
한때 권의 자유로운 영혼에 매료된 나는 어느샌가부터 그가 자신에게 아내라는 명색에 창녀 노릇을 바란다고 느낀다.
만취해 후배 코뼈를 부러뜨린 권을 대신해 사과하러 간 나는 아버지가 팬 거래처 관계자에게 어머니가 사과한 옛날을 떠올리며 복잡한 마음이 든다.
교수가 된 권은 그날 나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나는 스스로 '얼뜬 사람'이라고 느끼며 권의 얼굴에 물을 끼얹고, 머리에 막걸리를 붓는다.
소설가이자 평론가로 활동하는 주지영의 첫 소설집 '사나사나'(도서출판 강)에는 가부장적 현실에 상처 입고 그에 맞서는 여성의 치열한 분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표제작 '사나사나'의 '나'는 교수가 되겠다는 열망에 빠져 감정의 찌꺼기를 자신에게 쏟아내는 '권'과 불륜관계를 맺는다.
'백 년 후에'에서 디자이너가 되고자 악착같이 교수 밑에서 조수 역할을 하던 나는 예전에 잔 선배로부터 '섹스 동영상' 협박을 받고, '인간의 구역'과 '맞바람'에서 나의 남편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
'마고 할미의 오줌'에서 박사 학위까지 땄으나 남자들에게 밀려 자리 잡지 못하는 나는 무능한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다.
이 소설집은 이처럼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것이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여과 없이 보여준다.
다만 소설 속 '나'는 불합리한 현실을 그저 체념하거나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다.
그들은 욕하고 싸운다. 내 것을 내놓으라고 소리치고 막걸리를 상대 머리 위에 붓거나 휴대 전화를 던진다.
가끔은 '이젠 이게 맞니, 저게 맞니, 분별하고 논리를 세우는 것도 귀찮다. 사위가 밝으니 뱃가죽이 등짝에 들러붙은 것처럼 죽도록 배가 고플 뿐이다. 그도 배가 고프면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하기도 한다.
문학평론가 안서현은 "주지영 소설에서 몸이란 잊혀진 삶의 본질과 진실에 가깝다"며 소설들에 등장하는 여성의 몸에 집중한다.
'사나사나'에서 권이 나의 소설을 읽고 "몸 소설이더군요. 껍데기 소설만 읽다가 정말 오랜만에 몸 소설을 만났습니다"라고 하는데 이것이 주지영 소설을 설명해주는 핵심 문장이라는 것이다.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현실의 압력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간 그녀들은 '얼뜬' 엄마의 삶을 자신도 모르게 반복하면서도 그러한 삶에 대한 증오로부터 벗어나 그 삶에 대한 공감에 이른다. 여성의 삶의 역사는 백 년의 세월 동안, 아니 그 이상의 세상의 바람에 맞서온 몸의 역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소설 주인공들처럼 '세상의 까마득한 저 밑바닥'을 느끼는 여성 중 한 명인 작가는 그럼에도 '가슴속 불빛이 꺼지지 않길 바란다'.
"세상에 책을 내어놓는 그 순간, 나는 어둠의 한복판에 홱 내동댕이쳐지리라. (…) 이젠 나아가야 할지 돌아가야 할지 모를 지독한 어둠 속이다. 그렇지만 그 막막한 길에서 사무치도록 외롭게 웅크리고 있어야 시간은 나에게로 와, 켜켜이 쌓이는 서러운 말들을 소설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걸 위안 삼아 또 한 걸음을 떼보려 한다."
도서출판 강. 316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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