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 추가하락 막으려 대파·겨울 배추 산지폐기 현장에 탄식만 가득
(해남=연합뉴스) 천정인 기자 = "배추 키우는 농민들이 더는 설 자리가 없어요"
올해로 4번째 산지폐기에 들어간 전남 해남군 해남읍 한 배추 농가 현장.
7일 이른 아침부터 일용직으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배추를 트랙터로 갈아 엎기 위해서는 한 포기, 한 포기마다 묶여 있는 노끈을 먼저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상품 배추로 키우기 위해 농민들이 일일이 묶었던 그 끈이다.
이렇게 정성스레 키운 배추를 짓이겨야 하는 농민 허영조(52) 씨는 굳은 표정으로 트랙터에 올라탔다.
농사를 더 잘 지어보겠다며 사들인 트랙터로 멀쩡한 배추를 직접 폐기해야 하는 허씨는 작업하는 동안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요란한 트랙터 소리와 사각사각 배추 갈리는 소리만 밭을 가득 채웠다.
땅속에서 봉긋하게 올라온 배추는 트랙터의 대형 바퀴와 칼날에 짓뭉개지거나 갈기갈기 찢겼지만, 속살은 여전히 싱그러움을 간직할 정도로 질이 좋았다.
허 씨는 "값 오르기를 기대하고 배추를 놔두면 봄 작물을 심을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폐기하는 것"이라며 "어느 정도 보상은 나오겠지만 그래도 적자인 것은 매한가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저온저장고에 맡기는 방법도 있지만, 가격이 오르지 않으면 창고이용료로 적자만 더 커질 수 있어 선택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보는 상황이 정부의 농경 정책 실패 때문이라고 허씨는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허씨는 "한때 정부와 사회 분위기가 귀농을 추천했지만 이렇게 산지폐기를 하는데 과연 잘 사는 농민이 있겠느냐. 살길이 보이지 않는다"며 결국 고개를 숙였다.
시장 가격이 급락한 대파도 상황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해남군 옥천면에서 3천65㎡ 규모로 대파를 키우던 이모(72)씨도 이날 산지폐기에 나섰다.
아내와 아들, 며느리까지 온 가족이 물 주고 거름을 주며 고생해 키웠던 대파였다.
논 농사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지만 종자를 심고 새싹이 올라오는 것을 볼 때면 일이 힘든 줄도 모르고 재미가 있었다.
당초 이 밭에 고구마를 키웠다가 멧돼지가 농사를 망친 다음 선택한 대파 농사여서 수확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일부 수확한 대파를 내다 팔았더니 인건비도 안 나오는 값을 쳐줬다.
차라리 수확을 안 하는 것이 손해를 줄이는 일이었다.
멀쩡한 대파가 밭에 계속 있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차라리 눈에 안보이는 것이 낫다며 이씨는 결국 산지폐기를 결정했다.
수고비를 쥐여주고 마을 주민에게 빌린 트랙터가 밭을 갈기 시작하자 잘려나간 대파에서 알싸한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씨는 "뼈 빠지게 고생하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며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선 전부 폐기하고 싶었지만 보상금 예산 부족으로 재배 면적의 3분의 1 정도만 인정됐다.
오늘 이씨가 대파를 갈아 엎고 보상받은 돈은 180여만원에 불과했다.
폐기 작업이 끝나고 밭을 둘러보던 이씨의 표정은 허탈함이 가득했다.
짐짓 "속이 시원하다"며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그의 시선은 잘려나가 흙으로 범벅이 된 '대파 무덤'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농협 관계자는 "선제적으로 산지폐기를 하지 않으면 대파와 배추 가격이 더 떨어질 수 있다"며 "최대한 보상과 농가 피해 최소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in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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