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발목잡은 '안전장치'…배경엔 북아일랜드 '피의 역사'

입력 2019-03-13 11:11  

이번에도 발목잡은 '안전장치'…배경엔 북아일랜드 '피의 역사'
노딜 우려 증폭…북아일랜드 국경선으로 역사적 갈등 재연 가능성



(서울=연합뉴스) 전성훈 기자 = 영국 정치권이 유럽연합(EU)과의 브렉시트(Brexit) 합의안을 또 부결시키면서 전 세계 정치경제에 '대혼란'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이번 2차 투표 부결로 영국이 미래 관계 등에 대한 아무런 약정 없이 EU를 떠나는 이른바 '노 딜'(no deal) 브렉시트의 공포도 한층 커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영국 하원은 12일(현지시간) 브렉시트 합의안 및 '안전장치'(backstop·백스톱) 보완책을 놓고 찬반 투표를 진행해 찬성 242표, 반대 391표로 부결시켰다.
의회 역사상 최대인 230표 차로 부결된 지난 1월 1차 투표 때보다는 표차가 줄었지만, EU와의 합의안에 대해 의회 내에선 여전히 부정적인 인식이 우세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번에도 1차 투표 때와 마찬가지로 안전장치가 발목을 잡았다.
테리사 메이 총리가 전날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과 만나 영국에 안전장치의 일방적 종료 권한을 부여하는 것 등을 핵심으로 하는 보완책에 합의했지만, 의회로부터 만족스럽지 않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여기에는 투표 직전 제프리 콕스 영국 법무상이 안전장치를 일방적으로 종료할 수 있는 합법적인 수단이 없다면서 사실상 보완책의 실효성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안전장치는 영국이 작년 말 EU와 브렉시트 협상을 할 때도, 합의안이 나온 뒤에도 끊임없이 논란을 불러일으킨 '뜨거운 감자'였다.



안전장치는 영국 본토 서쪽에 있는 아일랜드섬 내 아일랜드와 영국 영토인 북아일랜드 국경에서 엄격한 통행·통관 절차(하드 보더·hard border)가 부활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현재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에는 사실상 국경이 없다. 인적·물적 이동이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이뤄진다.
하지만 영국이 EU를 탈퇴할 경우 여전히 EU 회원국인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에 사람의 이동이나 물품 통관 등에 있어서 문제가 불거진다.
안전장치는 이처럼 영국의 EU 탈퇴로 갑작스럽게 두 지역 사이의 통행·통관 절차가 엄격해져 혼란과 불편이 초래되는 일을 막고자 도입된 것이다.
하지만 EU 탈퇴를 원하는 많은 영국인, 특히 집권 보수당내 브렉시트 강경파와 야당인 노동당은 합의된 안전장치안이 부실하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안전장치 유지 기한이나 폐기 조건 등이 명시되지 않아 영국을 계속 EU 관세동맹 안에 가둘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이다.
즉, EU의 승인 없이는 독자적으로 다른 나라와 무역협정을 체결하거나 관세를 인상 또는 인하하는 등의 경제적 결정권이 제약을 받아 사실상 계속 EU에 예속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영국과 EU는 브렉시트 협상 때 안전장치 도입을 놓고 치열한 '밀당'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이 안전장치에 이처럼 예민하게 반응하는 배경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수백 년 간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아일랜드가 1949년 영연방에서 완전히 독립할 때 아일랜드계 구교도(가톨릭)보다 영국계 신교도가 많은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남았다.
하지만 영국이 소수 가톨릭계 주민에 대해 차별적 정책을 취하면서 신·구교도 간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1972년 1월엔 영국군이 시위하던 구교도 시민들에게 발포해 14명이 숨지는 최악의 유혈 사태가 빚어졌다.
이에 맞서 구교도는 아일랜드섬의 통일을 기치로 내건 무장투쟁조직 IRA(북아일랜드공화국군)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테러를 저지르는 등 '피의 악순환'이 끊이지 않았다.
반세기 가까운 이러한 유혈 충돌은 1998년 영국과 아일랜드가 벨파스트 협정을 맺으면서 가까스로 봉합됐다.
부활절 이틀 전인 성금요일에 체결됐다고 해 성금요일 협정이라고도 부르는 벨파스트 협정은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간 자유로운 통행과 통관을 보장하는 대신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 영유권을 포기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북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아일랜드 국민에게도 영국 국민과 똑같은 혜택이 주어진다.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에 지도상의 경계선만 있을 뿐 실질적인 국경이 없는 것도 이런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결과물이다.
이런 잔인한 역사를 기억하는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노 딜 브렉시트로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에 갑작스럽게 통행·통관의 자유가 사라져 다시 국경선이 그어질 경우 북아일랜드에서 과거와 같은 충돌이 재연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아일랜드가 다시 '유럽의 화약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브렉시트 논의가 한창이던 지난 1월 북아일랜드에선 폭탄 테러로 의심되는 폭발 사고가 발생했는데 IRA를 자처한 조직이 배후를 주장하고 나서 이런 우려를 증폭시켰다.
현재로선 노 딜 브렉시트의 충격파가 어떤 식으로, 어느 정도 범위로 밀어닥칠지 전혀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적어도 안전장치에 대한 뾰족한 해법이 나오지 않는 한 북아일랜드에서의 폭력적 갈등 표출에 대한 우려는 지속할 것으로 예상된다.


luch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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