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길을 묻다] "재벌 '빨대경제' 유망 중소기업 고사시켜"

입력 2019-03-24 06:01   수정 2019-03-24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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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길을 묻다] "재벌 '빨대경제' 유망 중소기업 고사시켜"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 인터뷰…'제2 벤처붐 큰 그림' 제시
"똑같은 대기업들 50년간 경제 이끌면서 경제 역동성 깨져"



(서울=연합뉴스) 특별취재팀 윤선희 김연숙 기자 = "우리 자본시장은 미국보다 젊은데, 경제는 겉늙었어요. 혁신성장 생태계를 조성하고 활성화해 유망 벤처기업을 대기업으로 키워내야만 경제가 살 수 있습니다."
이동걸(65) 산업은행 회장은 24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재벌 대기업 중심의 경제로는 역동성과 일자리를 기대하기 어렵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 회장은 "경제가 역동성을 회복하려면 새로운 기업이 생겨나야 한다"며 "이런 기업이 중소·중견으로 커나가 성장엔진이 교체되면서 일자리가 늘고 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면서 '기업들의 세대교체'를 강조했다.

◇ 성숙단계 대기업들, 역동성 막아…기업 세대교체 절실
20여년간 '재벌 개혁론자'로 불린 이 회장은 억울한 듯 "재벌이 미워서 그런 게 아니라 재벌의 존재가 우리 경제의 역동성을 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 회장은 "과거에 성장 유망한 기업이 있으면 재벌들이 의도적으로 죽였다. 기술탈취를 하든, 마케팅 파워를 발휘하고 얼마 안 되는 인력을 독점해 고사 직전까지 가게 했다. 겨우 연명할 중소기업 외에는 크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대기업그룹이 문어발식 확장으로 모든 걸 다 먹기 때문에 중소기업들이 커나갈 영역이 없어지고 '빨대 경제'로 기술과 이익을 가져가 중소기업이 발전할 여력이나 판로, 성장 의지도 사라졌다"고 꼬집었다.
이런 이유로 삼성 등 글로벌 기업은 탄생했지만, 생태계는 그만큼 크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50년간 똑같은 대기업들이 경제를 끌고 오다 보니 경제 역동성이 떨어졌다. 혁신성장을 하자는 것은 이런 영원한 하청구조를 깨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역사를 보면 미국은 젊은 기업이고 우리는 오래된 기업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역사로는 미국은 오래됐지만, 여전히 젊고 역동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는 짧은데 겉늙어버렸다"고 지적했다.
이 회장은 경제가 역동성을 가지려면 새로운 기업이 생겨 중소·중견, 대기업으로 커 성장엔진이 교체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기업 수명이 짧아지고 있다. 한 기업이 50년, 100년 갈 게 아니라면 새 기업으로 대체해야 한다"며 "미국에선 기업이 계속 생성된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1930년까지 대공황기에 생겨난 기업 중 살아남은 건 5∼6개에 불과하고 1970∼1980년대 휴렛팩커드, 애플이 등장하자 전통 기업들이 밀려났다. 현재 아마존과 구글이 선도하고 2000년 이후 설립된 페이스북, 넷플릭스, 우버 등 기업들은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기업들이 계속 생성, 성장해 경제 역동성이 생기면 어떤 효과가 생길까?
이 회장은 "좋은 일자리가 많이 생긴다"며 시애틀에 본사를 둔 아마존이 본사를 하나 더 두려고 하는데, 생기는 일자리가 5만개라고 사례를 들었다.
그러면서 "이미 성숙단계에 진입한 대기업그룹에선 좋은 일자리가 생길 수 없다. 일자리는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이 되고 대기업이 되려 할 때 늘어나는데 그 기간은 10∼15년"이라고 강조했다.
1970∼1980년대 종합무역상사 등 산업이 발전할 때 고급 일자리가 많아 대학만 졸업하면 취업하기가 쉬웠다. 그는 "기업이 막 커나갈 때 고급 일자리가 나오고 중소기업이나 연관기업의 파급 일자리도 많이 생긴다"고 했다.



◇ 부동자금 1천조원, 청년벤처로 와야…재벌들도 투자·변신 시도
페이스북, 구글, 넷플릭스가 한국에서 시작했다면 성공했을까?
이 회장은 "인재와 기술이 백업(뒷받침)되는지, 자본이 따라주는지, 제도·환경·문화가 같이 가는지 등 3가지가 중요한데, 우리는 다 약하다"며 "3가지를 어떻게 풀어주느냐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모험 투자를 하는 큰 펀드들이 필요하고, 강력한 사후 규제만 보장된다면 규제도 풀 때가 됐다는 견해를 보였다.
무엇보다 벤처시장으로 돈이 더 들어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회장은 "돈이 다 부동산으로 몰려 부동자금이 기준에 따라 800조∼1천200조원에 이른다. 이 돈과 (일자리를 못 찾은) 청년을 이어주는 게 벤처로, 둘을 맺어주면 일자리가 생기고 창업이 활성화한다. 벤처 투자는 위험은 있지만, 국가 경제도 돕고, 돈도 버는 진정한 모험 투자"라고 말했다.
특히 최근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들도 투자에 나서는 등 변신하는 모습이 주목된다고 언급했다.
이 회장은 "최근 2∼3년 생태계를 보면 4차산업혁명 충격이 오면서 재벌들도 과거 방식으로 생존이 어렵다고 느끼는 듯 변신하고 싶어하는 게 보인다"고 했다.
그는 "과거엔 하청업체 죽이기에 바빴다면 지금은 같이 크면 안 된다는 걸 느끼는 듯하다. 스타트업에 투자하거나 해외에 눈을 돌리고 있다. 오픈 플랫폼, 오픈이노베이션이 트렌드가 된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이 회장은 "실제 중국 벤처자금의 절반은 텐센트와 알리바바에서 나온다는 얘기가 있다. 큰 기업이 과실을 시장에 뿌려 자기네가 활용도 하고 기업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벤처 투자에선 실패를 용인해주는 인식 기반이 필요하다. 그는 "실패한 벤처기업가의 재기도 도와줘야 하지만 자본가의 실패도 인내하고 도와줘야 한다. 실패를 이해해주지 않으면 자본가 입장에선, 특히 공공기관들은 안전한 투자만 하게 된다"고 조언했다.



◇ 유니콘기업, 20∼30개 나와야…벤처 혁신은 소명
이 회장은 과거 정부가 구조조정 숙제를 해놓고 혁신 창업에 나섰다면 새로운 기업을 더 키워나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는 "(과거에) 숙제도 안 하고 기업도 키우지 않아 우리가 너무 바쁘지만, 혁신 창업은 소명"이라고 했다.
"우리가 열심히 하면 다음, 그다음에 빛을 볼 것이다. 차기 정권이 덕을 보더라도 지금 혁신 창업을 해놓지 않으면 우리 기업은 회생이 안 된다. 당대에 자기가 덕 보는 일만 하면 대한민국 경제는 살아날 길이 없다"고 강조했다.
산업은행은 1960∼1980년대 초까지 지금의 대기업 탄생과 경제 근간을 이룬 '산업화의 주역'이다. 4차산업 혁명 시대를 맞아 새로운 중소·중견·벤처기업 성장의 주역이 되기로 했다.
한 축에선 과거 정부가 못한 기업 구조조정이라는 숙제를, 다른 한 축에선 세대교체를 위한 스타트업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벤처기업 투자유치 플랫폼 'KDB 넥스트 라운드'를 조성하고 130개 벤처기업에 7천억원 투자를 맺어줬다. 또 기술 평가가 가능한 연구기관과 협조해 기술금융플랫폼도 조성해 20개 기업에 기업당 20억원씩 432억원의 투자를 연결했다.
올해 혁신성장 분야에 14조5천억원을 공급하고, 중소·중견기업에 44조원을 투입한다. 이 회장은 "경제 활력이 생기려면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조원 이상 벤처기업)이 적어도 20∼30개는 나와야 한다"며 "혁신 창업기업 발굴, 지원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기존 대기업에 대해선 지원을 가급적 줄이되 변신을 위해 기술투자 등 4차산업 혁명을 위해 준비하는 건 도와줄 것"이라고도 했다.
이 회장은 "20년 후에 '내가 키웠다'라고 할 수 있는 대기업이 2∼3개만 나와줘도 행복하겠다"고 덧붙였다.


indigo@yna.co.kr, nomad@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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