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연합뉴스) 황철환 특파원 = 말레이시아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사망한 일본군 병사들의 기념비를 세우고 이들을 영웅시하는 내용이 담긴 안내판을 세워 논란이 일고 있다.
26일 일간 더스타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크다주 관광 당국은 21일 현지 일본영사관과 함께 알로르 스타르 인근 크다 강변에 일본군 전몰자 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1941년 연합군이 장악한 다리를 공격하기 위해 폭탄이 실린 오토바이를 몰고 달려들다가 폭발물이 너무 일찍 터져 사망한 일본군 장교와 병사 3명을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
이들의 유해는 '쿠부르 즈펀'(일본인 묘)란 이름으로 불렸던 바위 아래 묻혀 있다가 약 10년 전 발굴돼 일본으로 송환됐다.
문제는 기념비와 함께 세워진 안내판에 적힌 내용이다.
영어와 중국어, 말레이어로 적힌 이 안내판에는 일본군 장교와 병사들을 "알로르 스타르를 정복한 일본 영웅들"이라고 기술하는 등 일본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말레이시아인들 사이에선 중국계를 중심으로 강한 반발이 일었다.
1941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말레이반도를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 본토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싱가포르에서만 2만4천∼5만명을 살해하는 등 1945년 패전하기까지 중국계 주민을 가혹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크다주 관광 당국 등 관련 기관에는 페이스북 등을 통해 "큰 실수다", "이 기념비는 말레이시아의 독립투쟁에 대한 모욕"이라는 비판이 쇄도했다.
한 네티즌은 "내 조상은 일본군에게 살해됐는데 크다주 정부는 침략자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다. 너무나 모욕적"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중국계 정당인 말레이시아화교연합회(MCA)의 크다주 청년위원회는 기념비 주변에 "일본군은 영웅이 아니다"란 플래카드와 일본군의 잔혹 행위를 알리는 게시물 등을 설치하고, 기념비를 즉각 철거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크다주 정부는 일본 정부 당국자와 안내판 제작업자 간에 소통 문제가 생겨 번역이 잘못됐을 뿐이라면서, 안내판 문구는 수정하지만, 기념비 자체는 그대로 보존할 것이라고 밝혔다.
모흐드 아스미룰 아누아르 아리스 크다주 관광위원회 위원장은 "이런 식이라면 1511년 믈라카를 점령했던 포르투갈군이 세운 기념비 등도 모두 철거해야 할 것"이라면서 MCA 청년위원회가 계속 문제를 제기할 경우 인종갈등을 부추기는 것으로 보고 경찰에 고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군은 말레이시아를 점령했을 당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말레이계와 인도계는 협조적이라는 이유로 비교적 온건한 대우를 했다. 현지인 중에는 일본의 침공 덕분에 독립이 빨라졌다고 보는 이들이 상당수다.
hwangc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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