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시뻘건 불길 아직 생생해…공황장애로 약까지 먹어요"

입력 2019-03-27 10:14  

[르포] "시뻘건 불길 아직 생생해…공황장애로 약까지 먹어요"
고성 산불 1년, 임시 주택에 몸 맡긴 국가유공자 유가족
다음 달 임대 계약 끝나…"비닐치고 살더라도 여기 있고 싶어"



(고성=연합뉴스) 양지웅 기자 = 강원 고성군 탑동과 가진리 일대 산림을 이틀 동안 쑥대밭으로 만든 산불이 난 지 1년이 지났다.
화마가 쓸고 간 자리는 올봄에도 어김없이 노랑제비꽃이 폈다. 산길을 따라 매화도 만발했다.
하지만 화재로 집을 잃은 노파의 가슴은 여전히 검게 그을려 있다.
"매캐한 연기가 집안 가득하던 모습이 아직 생생해요. 자다가도 심장이 벌떡벌떡 뛰고, 병원을 가니 공황장애라고 약까지 주더라고."
27일 오전, 국가유공자 유가족인 최옥단(73)씨는 1년 전을 떠올리자 끔찍한 악몽에 금세 호흡이 가빠졌다.
1년 전 산불이 났을 때 최씨는 산 아랫자락 자택에서 잠을 자다 매캐한 냄새에 눈을 떴다.

연기가 점점 번지는 상황에서 소방차와 경찰차가 집 건너편 산으로 줄지어 향했다.
때마침 찾아온 의용소방대원의 도움으로 그는 아들과 함께 급히 집을 빠져나왔다. 자욱한 연기에 옷가지나 가재도구를 챙길 겨를 없이 지갑과 휴대전화만 챙겨 몸만 피할 수밖에 없었다.
불길은 앞마당을 지나 창고와 집 전체를 집어삼켰고, 네 평 남짓한 컨테이너를 빼놓고 모든 것이 불타버렸다. 16년 동안 살던 터전을 한순간에 잃은 것이다.
최씨는 잿더미 속을 뒤지고 또 뒤졌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남편의 유품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이 남긴 무공훈장은 화마에 땜납 덩어리처럼 녹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최씨의 남편 김남출씨는 1971년 월남전과 1987년 향로봉 무장간첩 생포 공로를 각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을 두 번 받았다.
6년 전 병환으로 남편을 떠나보낸 뒤 최씨는 어려운 삶이지만 국가유공자 집안이라는 자부심으로 훈장을 지켜왔다.
그는 당시 "남편을 보낸 뒤 힘들게 살면서도 집 한쪽에 고이 모신 훈장인데 알아볼 수도 없으니 이게 다 내 운명인가 보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 소식을 접한 강원도는 지난해 5월 두 개의 훈장을 복원해 위로금과 함께 최씨에게 전달했다.
그가 다시 일어서길 바라는 마음에 많은 사람이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특히 전몰군경미망인회가 힘써 도왔다.
최씨는 "같은 아픔을 가진 미망인회가 곁을 지켜줘 많은 위로가 됐다"며 "지금도 그 모임은 빠지지 않고 나간다"고 말했다.
당장 기거할 곳이 없는 그를 위해 고성군은 전국재해구호협회에서 마련한 조립식 임시 주택을 1년 동안 빌려줬다.
하지만 다음 달이면 계약 기간이 끝나 대안을 찾아야 한다.
고성군이 계약 연장은 힘들다는 입장을 보이는 까닭이다.
계약서에는 "사용 기간은 12개월을 지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명시됐다.
최씨는 "당장 대책이 없어 계약 연장을 하고 싶지만, 군은 계약 기간이 끝나면 400만원을 주고 이 집을 사거나, 아니면 집을 가져간다고 했다"며 토로했다.
그는 화재 이후 군유지인 집터 일부를 사들여 집을 지으려고 했으나 군과 행정적 갈등을 겪어 이마저도 무산됐다.

산불이 삶을 삼켰던 그 날, 집 앞마당에는 매화가 흐드러졌다. 1년이 지난 지금도 어김없이 매화가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털이 그을린 채 마당 구석에 숨어 불길을 피하던 강아지는 이제 늠름한 백구로 커 집을 지키고 있다.
남편과 함께 논밭을 일구던 이곳에서 최씨는 삶을 이어가고 싶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이다.
그는 "비닐을 치고 살더라도 여기에 있고 싶다"고 마지막으로 하소연했다.
지난해 3월 28일부터 이틀 동안 불탄 산림 356만8천500㎡(축구장 500개 면적)는 복구 작업이 한창이다.
군은 지난 20일까지 산불 피해목 벌채 작업을 마쳤고, 현재 작업반을 투입해 벌채목을 정리하고 있다.
다음 달부터 군유지와 사유지 187만여㎡에 조림 작업을 시작한다.
소나무와 잣나무, 자작나무, 호두나무, 대추나무 등 10개 수종 367만8천여 그루를 심을 계획이다.

yangdo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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