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 트라우마'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지난해로 3만 달러를 돌파했다. 그렇다면 행복지수도 그만큼 올랐는가? 소득은 증가하지만 많은 이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비율은 오히려 과거보다 줄었다.
왜 그럴까? 그 중요한 이유는 불평등이다. 우리나라 불평등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계속 심화했다. 특히 상위 10%의 소득집중도는 선진국 가운데 미국 다음으로 높다. 정부의 소득 재분배 역할도 미미하다. 불평등이 미치는 심리적 영향력과 사회적 스트레스 또한 심각하다.
이는 한국만의 일이 아니라 전 지구적 현상이다. 오늘날 전 세계 최고 부자 20명이 벌어들인 재산은 가장 가난한 사람 10억 명의 재산 총합과 같다고 한다. 20대80의 사회는 이미 철 지난 이야기. 1대99 사회도 아니다. 0.1대99.9 사회라고 할 만큼 빈부 격차는 말 그대로 천양지차가 돼버렸다. 대기업이 잘 되면 덩달아 중소기업과 소비자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는 주류 성장론자들의 '낙수효과' 논리가 허구였음이 드러난 지 이미 오래다.
'불평등'은 이 시대의 대표적 상징어다. 부자와 빈자는 만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졌고, 그 중심추 구실을 하던 중산층은 갈수록 줄어든다. 불평등이 지위 불안과 함께 자기 혐오, 상대적 박탈감, 수치심 등을 증가시키고 있는 가운데 그 피해 계층은 불평등에서 이익을 얻는 승자들이 심어놓는 거짓말에 쉽게 넘어간다. 노력 부족, 자기 책임론이 그것이다. 이럴 경우 구조적 접근은 난망해진다.
불평등 문제를 깊이 탐색한 외국 석학들이 펴낸 책이 동시에 나왔다. 영국의 리처드 윌킨슨과 케이트 피킷이 쓴 '불평등 트라우마', 폴란드 출신으로 역시 영국에서 학문 활동을 한 지그문트 바우만이 집필한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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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득 격차와 사회적 지위의 심리적 영향 살핀 '불평등 트라우마'
저자들은 10년 전 펴낸 '평등이 답이다'를 통해 빈부 간 소득 격차가 큰 사회에 사는 사람이 비교적 평등한 사회에 사는 사람보다 각종 건강문제와 사회문제에서 고통받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사실을 보여준 바 있다.
이번 책에서는 불평등이 미치는 이런 심리적 영향력과 사회적 스트레스의 정체를 중점적으로 탐색했다. 불평등이 사람들 마음에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 불평등이 불안 수준을 어떻게 높이는지, 다양한 정신질환과 정서적 장애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며 사는지 꼼꼼히 들여다봤다.
저자들은 소득 순위가 절대적 소득보다 정신적 고충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절대적 기준에 집안이 부유하거나 빈곤한지보다 주변 가정과 비교했을 때 자신의 가정 소득 순위가 어떠한지가 심리에 더 강한 영향을 미치더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자기고양적 편견과 자아도취증도 불평등과 연관됐음을 다양한 사례와 증거로 말해준다. 불평등이 사회적 지위를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만든다는 얘기.
나아가 불평등이 증가하면 사이코패스 성향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그만큼 늘어나고, 심지어 그런 경향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쟁환경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기업 경영자들이 정신병원에 감금된 환자들보다 여러 부정적인 기질 측면에서 점수가 더 높았다는 연구 결과 또한 놀랍다. 그 대표적 사례로 든 인물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저자는 트럼프의 허풍스러운 자기도취 사례를 언급하면서 불평등 의식이 높은 미국 사회의 유권자 심리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보여준다.
다른 부유한 국가들과 비교할 때 미국은 부자와 빈자 사이에 소득 격차가 가장 크게 나타나고 살인율과 정신질환자 비율, 10대 출산율도 제일 높았다. 반면 기대수명은 가장 낮고 아동의 행복 수준과 수학 성취도 및 문해력 역시 낮더라는 것. 미국 다음으로 불평등한 나라인 영국과 포르투갈도 이런 지표에서 매우 좋지 않았다. 반면에 북유럽 국가와 일본 같이 비교적 평등한 국가는 바람직한 결과를 보였다.
저자들은 "소득 격차가 클수록 지위 격차는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면서 "평등의 확대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지속가능 사회의 전제조건으로, 경제 민주주의를 확대해야 한다"고 그 당위성을 역설한다. 불평등이 결국은 최상층에서 최하층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기 때문이다.
생각이음 펴냄. 이은경 옮김. 468쪽. 1만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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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평등에서 벗어나는 길 모색한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이 책 초판은 2013년에 같은 제호로 국내 출간된 바 있다. 이번 책은 그중 이 시대를 관통하는 내용을 간추려 새롭게 편집한 셀렉션판(선집판)이다. 저자 바우만은 1925년에 태어나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으로 도피했다가 폴란드 의용군에 가담했고, 1950년대부터는 폴란드, 이스라엘, 영국을 떠돌며 교수로 활동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저자는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격차가 날로 커지는 구조에서 왜 희생자들의 분노 목소리가 터져 나오지 않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분노는커녕 오히려 부자 감세와 복지 예산 삭감에 동의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불평등의 희생자들이 불평등을 오히려 옹호하고 평등의 외침을 비웃는 기이한 현상이 빚어지는 이유는 과연 뭘까?
바우만은 이 거짓 믿음을 인간의 힘으로 맞서거나 개혁할 수 없는 '당연한 세상 이치'로 오해하기 때문이라면서 가장 비근한 예로 부자들이 잘 되면 가난한 자들도 잘살게 된다는 '낙수효과' 이론을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러지 않다. 부자는 갈수록 더 부자가 되고, 부자 중에서도 최상층은 더욱더 큰 부자가 된다. 반면에 중산층이 공동화하는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갈수록 늘어만 간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명박 정부 당시 '낙수효과'론이 기승을 부렸다.
저자는 불평등으로 이익을 얻는 계층이 손해를 보는 계층에게 심어놓은 대표적 거짓말로 다음 네 가지를 꼽았다. 경제 성장이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가 행복을 충족시켜 준다는 믿음, 인간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라는 믿음, 경쟁은 사회질서의 재생산과 사회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라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불평등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가 희생 계층이 스스로에게 내린 '열등의 선고'를 거두는 것. 저자는 "우리를 옥죄는 거짓 믿음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면서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손쉽게 타협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거짓 믿음에 근거한 잘못된 선택이 우리를 옥죄는 구조화한 현실을 만들어 공고히 하는 고리를 끊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부정의한 현실을 바꾸는 출발점이 되리라는 얘기다. 저자는 지난 2017년 초에 9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출판사는 바우만의 또 다른 저서 '왜 우리는 계속 가난한가?'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도 셀렉션판으로 내주에 발간한다.
동녘 펴냄. 안규남 옮김. 144쪽. 1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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