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 1963년 미국 와이오밍주. 술 먹고 싸움질하다 예일대에서 쫓겨난 딕 체니. 이번에는 음주운전으로 경찰 단속에 걸려 유치장 신세를 진다. 그를 떠나겠다는 아내의 엄중한 경고에 딕은 정신 차리겠다고 약속한다.
2001년 9월 11일 대통령 비상상황센터. 부통령 딕은 9·11 테러가 발생하자 대통령을 대신해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에게 "위협으로 판단되는 항공기는 격추하라"고 지시한다.
다음 달 11일 개봉하는 영화 '바이스' 도입부다. 영화는 '밥벌레'라 불리던 예일대 퇴학생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통령이 된 딕 체니의 극적인 삶을 코믹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보여준다.
아내 덕분에 겨우 정신 차린 딕은 인턴으로 의회에 들어가 럼즈펠드 밑에서 일을 배운다. 어리숙한 청년이었던 그는 차츰 정치와 권력의 속성을 꿰뚫게 되고 정치적 야망도 품는다. 이후 백악관 최연소 수석보좌관에 임명되는 등 워싱턴 전문가로 이름을 떨치다 펜타곤 수장과 미국 석유 시추회사 홀리버튼 대표이사를 지낸다.
한동안 정계를 떠난 그는 조지 W.부시 제안으로 2001년 부통령이 된 뒤 백악관 인사들을 자신의 심복들로 채운다. 견제받지 않은 권력을 지니게 된 그는 막전막후에서 사실상 대통령을 능가하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극 중 조지 W.부시 대통령은 꼭두각시처럼 묘사될 정도다.
영화는 딕 체니를 "세상이 혼란스러워질 때 기회를 엿보는" 인물이자, 세계 역사 흐름을 바꿔 수백만 명에게 영향을 끼친 결정들을 "유령처럼 해냈다"고 묘사한다. 그가 내린 결정들은 부자 감세, 지구온난화 조치에 대한 제동, 대기업 규제 철폐 등이다.
특히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미국은 "후세인이 대량파괴 무기를 보유해 미국과 동맹국에 쏠 것"이라며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 결과 수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대량파괴 무기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2008년 금융위기를 다룬 '빅쇼트'(2016)의 애덤 매케이 감독은 비밀스러운 권력자 딕과 주변 인물을 통해 권력의 민낯과 위험성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세계 최강국가 미국에서 몇몇 실세와 측근들이 제 이익을 우선순위에 두고 자의적인 법 해석을 통해 국정과 세계정세를 좌지우지하는 모습은 씁쓸함을 넘어 허탈함을 안긴다.
통상 전기영화와 달리 현재 생존한 인물을 스크린으로 소환했다. 그런데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있어 "이 이야기는 실화, 혹은 실화에 가까운 이야기"라는 전제를 깔고 출발한다.
다큐멘터리 '화씨 9/11'(마이클 무어 감독)을 떠올리게도 한다. 내레이션으로 진행되고, 자료 화면 등이 곳곳에 삽입됐다. 풍자도 꽤 직접적인 편이다.
예컨대, 딕이 자신에게 강력한 권한을 주면 부통령직을 맡겠다고 하자, 조지 W 부시가 이를 수락하는 장면에선 물고기가 미끼를 무는 장면을 보여준다.
식당 지배인이 딕과 측근들에게 헌법과 국제협약에 위배되는 의견을 메뉴 설명하듯 쏟아내는 장면도 대표적이다.
중간에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기도 한다. 대권과 동성애자 딸을 두고 선택의 갈림길에 섰던 딕이 딸을 보호하기 위해 대권을 포기한 순간이다. 딕이 그대로 정계를 영영 떠났더라면, 해피엔딩 결말을 가져왔을 거라는 바람이 투영된 듯 보인다.
딕 체니 역을 맡은 크리스천 베일의 연기가 단연 압권이다. 배역을 위해 20㎏ 이상 살을 찌운 그는 자신을 완전히 지우고 딕으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딕의 동반자이자 동업자였던 아내 린 체니 역을 맡은 에이미 애덤스의 연기도 뒤지지 않는다. 다양한 실험적 연출과 실존 인물에 대한 강력한 풍자, 권력에 대해 비판, 배우들의 호연은 관객 구미를 당길 만하다. 그러나 극은 전반적으로 산만하고 메시지는 직접적인 편이어서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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