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평생학습관, 함부로 다뤄진 책 전시하는 '훼손도서展'
(서울=연합뉴스) 황예림 인턴기자 = 안녕하세요. 저는 세상에 나온 지 1년이 채 안 된 여행 가이드북, '프렌즈'라고 해요. 아직 세상에 남아서 할 일이 많은데 지난 9일부터 마포평생학습관에서 저의 장례식이 열렸어요. 제 이야기 들어보실래요?
저는 태어나자마자 마포평생학습관으로 왔어요. 서점으로 간 친구들은 좋은 주인 만나 따뜻한 집에서 산다지만, 전 하나도 부럽지 않았어요. 책이 37만권이나 있는 도서관에서 많은 사람에게 유익한 정보를 전해주고 싶었거든요! 실제로 저를 찾는 사람들은 많았어요. 전 스페인의 맛집과 좋은 여행지를 추천해줬어요. 여행 가이드북으로서 뿌듯한 나날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이었어요. 언제나처럼 도서관 이용자에게 여행 정보를 알려주던 중 갑자기 '부욱'하고 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어요. 그 이용자가 제 몸의 일부를 찢어버린 거죠. 여행 준비에 필요한 페이지를 가져가겠다면서요.
사실 제 몸에 낙서하거나 실수로 찢는 사람은 평소에도 많았어요. 그럴 때마다 고맙게도 도서관 직원들이 낙서를 일일이 지워주고 찢어진 부분은 테이프로 붙여서 치료해줬어요. 하지만 이번엔 치료로 복구할 수 없을 만큼 심하게 훼손이 돼 버린 거예요. 다른 이용자들이 저를 보고 "이게 뭐야? 중요한 페이지가 없네"라고 불평했어요.
이번에 저와 함께 합동 장례식을 한 다른 책 친구들도 비슷한 처지랍니다. 한 권은 물에 홀딱 젖어서 쭈글쭈글해지다 못해 까맣게 곰팡이가 피었고, 다른 한 권은 페이지 가득 주황색 색연필이 칠해졌어요. 사람들의 성적이 오르는 건 다 자기 덕이라며 으스대던 문제집 친구는 답이 문신처럼 새겨져 더는 다른 학생들을 도와줄 수 없게 됐어요.
도서관 식구들은 이런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는지 도서 훼손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우겠다며 장례식을 열어줬어요. 이름하여 '훼손도서전'이에요. 도서관 한복판에서 장례식이 치러지니 많은 이들이 한 번씩 제 모습을 보고 가더군요. 9일 시작된 장례식은 이번 달 21일까지 이어진대요.
장례식 후에 저희는 어떻게 되느냐고요? 원래 훼손된 도서라도 필요로 하는 도서관 등이 있다면 보내지는데, 요즘엔 저희를 원하는 곳이 별로 없어서 고물상 같은 곳에 팔릴 거래요. 이제 저는 수명을 다한 고서(故書)가 돼 마포평생학습관을 떠나지만, 다음에 들어올 친구들은 여기 오래 머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면 좋겠어요. 제 친구들은 조금만 더 아껴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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