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 시정연설서 제재와 장기전 예고하며 '연말까지 기다리겠다' 언급
내년 美대선국면 본격 진입 전에 3차 북미회담 통한 합의도출 압박
간극 좁히지 못한 북미…교착 장기화 막을 韓정부 외교력 주목
(서울=연합뉴스) 조준형 기자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미국에 사실상 '연말 데드라인(시한)'을 제시하면서 '하노이 결렬' 이후 북미간 기싸움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한 양상이다.
김 위원장은 12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우리와 공유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은 조건에서 제3차 조미(북미)수뇌회담을 하자고 한다면 한 번은 더 해볼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올해 말까지는 인내심을 갖고 미국의 용단을 기다려볼 것"이라며 '연말'을 모종의 시한으로 제시했다.
연말까지 미국의 태도변화가 없을 경우 어떤 행동을 취하겠다는 언급은 없었다. 그러나 발언의 맥락으로 미뤄 신년사에서 거론한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뜻일 수 있어 보인다. 현재 중단 상태인 핵·미사일 실험을 재개하며 핵무력 고도화의 길을 갈 수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도 없지 않아 보인다.
우선 김 위원장이 3차 북미정상회담의 문을 열어둔 채 연말까지를 '시한'으로 제시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여부가 걸린 내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본격적인 선거 국면으로 들어가기 전에 3차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의미있는 합의를 이뤄냄으로써 2021년 1월까지인 트럼프 대통령 현 임기 안에 북미협상에서 돌이키기 어려운 지점까지 진행하려는 의지의 표현일 수 있어 보인다.
또 연내에 북한이 동의할 수 있는 방식의 합의를 도출하지 못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대표적 외교치적으로 자랑하는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중단이 계속 유지될 것으로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일종의 압박 메시지라는 해석도 있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13일 "김 위원장 연설은 '우리를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가 받을 만한 안을 한미가 만들어서 오라'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김 위원장이 연말까지로 일종의 협상 기한을 제시한 것으로 봐야한다"며 "다소 긴 시간을 상정한 것은 제재로 인해 쫓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음으로써 협상력을 높이려는 차원일 수 있다"고 부연했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김 위원장이 다시 공을 미국 쪽으로 쳐 보냈다고 생각한다"며 "하노이에서의 미측 요구를 '강도적'이라고 평가하면서 자신들의 '단계적·동시적 해법'을 12월 말까지 받아들이라고 요구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이어 "제재 돌파를 특별히 강조한 김위원장 연설에서 제재 때문에 힘이 드는 북한의 상황이 읽힌다"며 "연말까지로 시한을 설정한 것은 제재를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가 그때까지라는 판단에 따른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북미 양측의 입장은 40여일 전 결렬된 하노이 담판때와 비교해 기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한미정상회담에서 제재 유지를 공언하자, 김위원장은 제재와의 '장기전'을 선언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 핵무기 폐기를 포함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빅딜' 요구를 김 위원장이 사실상 일축했다는 점 역시 양측 간의 간극을 재확인시켰다.
다만 김 위원장이 '시한'을 설정했지만, 대화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는 점과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고 밝히며 돌파구 모색에 본격 나설 것을 선언한 것이 새로운 상황이다.
연말까지 아직 8개월여 남아있는 만큼 '외교'가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이번 연설과 한미정상회담(11일·워싱턴)에서 나타난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 사이에 간극이 커 북미협상에는 험로가 예상된다.
더욱이 양측은 저마다 시간이 자기편이라는 견해를 드러내며 쉽게 양보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했다.
김 위원장은 연설에서 "미국이 우리 국가의 근본이익에 배치되는 요구를 그 무슨 제재해제의 조건으로 내들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와 미국과의 대치는 어차피 장기성을 띠게 되어있다"고 했고 트럼프 대통령도 한미정상회담때 북미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을 열어두되 서두르지 않을 것을 밝힌 셈이다.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결국 양측이 '시간과 싸움'을 하면서 한반도 정세는 불안한 교착 국면이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 모두 3차 북미정상회담 개최에 문을 열어두고 있는 점, 두 정상 다 상대와의 특별한 관계를 거론하고 있는 점 등은 '톱다운'식 돌파구 마련에 한 가닥 기대를 걸게 하는 요인이다.
김 위원장이 나름의 '시한'을 제시한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도 재선 여부가 걸린 내년 대선을 앞두고 북한 문제를 외교 성과로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북미 합의도출을 시도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 지점에서 한국 정부의 역할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일괄타결을 바라는 미국의 '빅딜론'과 단계적 해법을 희망하는 북한의 '스몰딜'의 접점으로 거론되는 '포괄적 합의-단계적 이행' 방안을 북한과 미국에 제시하며 이른바 '굿이너프 딜'(good enough deal, 충분히 좋은 합의) 또는 '조기수확'(초기단계 상호 이행조치를 담은 합의)을 지속 모색할 것으로 예상된다.
고유환 교수는 "김 위원장이 미국식 '빅딜'안을 거부했지만 '판'을 깬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새로운 길'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면서 대화와 협상의 틀을 유지하려 했다"며 "남북미가 실무협상을 가동하든 어떤 형태로든 협상의 틀을 빨리 마련해서 논의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박원곤 교수는 "미국이 하노이에서 제시한 '빅딜'이라는 것은 비핵화의 정의와 최종 목표(end state)를 담은 것으로서 '액션 플랜'(이행 계획)과는 다른 이야기"라며 "북미간에 액션 플랜을 논의할 여지는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는 북한에 비핵화 정의를 명확히 하고,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계속 설득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북한이 대미 실무협상에 나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jhcho@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