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바 지하루 일본 메이조대 교수 강연회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군사사(軍事史) 측면에서 보면 일제가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한 시점은 1904년 2월 일본군의 서울 점령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러일전쟁 전문가인 이나바 지하루(稻葉千晴) 일본 메이조대 교수는 한국역사연구원(원장 이태진)이 16일 오후 중구의 한 식당에서 연 강연회에서 "러일전쟁을 빌미로 한국에 들어온 일본군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물러나지 않았고, 1945년 8월 15일까지 압도적 군사력으로 한국 지배를 떠받쳤다"고 강조했다.
이나바 교수는 일본이 1904년 2월 한국 점령 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고, 군정도 시행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계엄령은 통상 군대가 외국 영토를 점령했을 때 치안 유지를 위해 선포한다.
그는 당시 일본 육군 참모부가 한국과 만주 점령을 전제로 개전 전에 '계엄령 실시에 관한 대방침'이라는 문건을 작성했으나, 만주에서만 계엄령을 발포하고 한국에서는 '계엄'이라는 용어를 피하고 군율만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이나바 교수는 "계엄령은 효력이 미치는 범위와 기간이 제시되지만, 군율은 그렇지 않다"며 "그러나 조문에 나오는 행위를 어기면 극형을 포함해 위반 행위에 상응하는 형벌을 가한다는 점은 동일하다"고 분석했다.
이어 "일본군은 한국을 러시아의 위협에서 해방했고, 점령군으로서 지배하지 않고 있다는 자세를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라며 "일본군의 주된 목적은 러시아군 타도였기 때문에 한국인으로부터 적대시될 명령을 피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측했다.
즉 일제는 러일전쟁 이전부터 한국을 통치하려는 생각이 있었기에 기간이 정해진 계엄령 대신 군율을 포고했고, 이후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나바 교수는 러일전쟁이 종료하자 일본군이 한국을 점령할 명목이 사라지고 군율도 효력을 잃었으나,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체결해 지배를 이어갔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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