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 가치 반년 만에 최저…중앙은행 대처 역량에 의구심
불황 속 정정불안 강타…전문가 "이런 우려 20년 만에 처음"
(서울=연합뉴스) 장재은 기자 = 유럽과 중동 사이의 유력 중진국인 터키의 경제가 위태롭다는 진단이 나온다.
경기침체, 민생고, 미국과의 갈등에 내부 정정 불안까지 겹쳐 금융시장이 요동치자 외환위기 우려까지 감지된다.
17일(현지시간) 미국 CNBC방송 등에 따르면 터키 통화인 리라화의 가치는 6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리라의 1달러당 환율은 전날 한때 5.82리라까지 치솟아 작년 10월 이후 최고를 찍은 뒤 이날도 5.74리라 정도에서 거래됐다.
불과 2년 전인 2017년 중반까지만 해도 리라의 가치는 달러당 3.5리라 정도로, 현재보다 월등히 높았다.
특정 통화의 가치는 해당 국가의 신인도와 연계돼 있어 정치나 경제의 불안 요인이 발생하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전문가들은 터키 리라화의 최근 가치 급락이 터키 정치와 관계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이스탄불을 야당에 내주자 이날 재선거를 요구해 정정 불안을 키웠다.
블루베이 자산운용의 신흥국 담당 선임 전략가인 애쉬 티머시는 "재선거가 정말 이뤄진다면 시장은 불확실성을 싫어할 것"이라고 말했다.
티머시는 "재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터키의 선거 절차가 안전하지 않다는 낙인이 찍혔다"고 리라 가치 급락의 원인을 설명했다.
터키 중앙은행은 외환보유액을 크게 줄이며 리라 가치를 떠받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달러나 유로 같은 기축통화로 사업거래를 하는 현지인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알리안스번스타인의 신흥시장 채권 전략가인 새마일라 칸은 "선거 때문에 터키 정부가 계속 불안정해질 위험이 크다"며 "재선거가 리라 가치하락을 부추기는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리라 가치가 떨어지면 외화표시 부채를 갚을 능력이 그만큼 저하되는 까닭에 경제에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터키 중앙은행이 리라 가치를 방어할 역량이 의문스럽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터키의 외환보유액이 4월 초 281억 달러(약 31조9천억원)로 전해졌는데, 단기로 빌린 외환을 빼면 160억 달러(약 18조1천600억원) 미만으로 축소된다고 지적했다.
사실 터키경제는 최근 악화한 정정 불안을 차치하고도 총체적 난국으로 부를 만한 역경에 직면했다.
터키는 작년 3, 4분기 국내총생산(GDP)이 연속으로 감소해 공식적으로 경기후퇴(recession)에 들어갔다.
또 작년 1년간 달러 대비 리라화 가치는 무려 36%나 급락했다.
여기에는 복잡하고 다채로운 정치, 경제적 요인들이 뒤얽혀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물가가 치솟고 있음에도 중앙은행이 독립적 통화정책을 펼치지 못하게 압박하고 있다.
이는 투자자들의 불안감을 부추기는 원인으로 지적된다.
터키 기업들의 외화표시 부채는 위험 수위에 이르렀고 시장은 상환능력에 의구심을 품고 있다.
불황의 늪에서 민생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물가가 19% 이상 치솟은 데다 올해 1월 실업률은 14.7%로 10년 만에 최고점을 찍었다.
그 와중에 터키는 기축통화 보유국이자 세계 1위 경제국인 미국과 갈등을 빚고 있다.
미국은 러시아산 미사일방어체계인 S-400 도입, 소수민족 쿠르드에 대한 탄압 등을 두고 터키 정책에 심각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터키에 파멸적 경제제재를 가할 수 있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작년에도 터키에 철강·알루미늄 고율 관세를 전격 부과해 금융시장 혼란을 촉발한 바 있다.
블루베이의 전략가 애쉬는 터키가 S-400 구매를 마무리하면 미국의 제재를 받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며 "20년간 터키를 다뤄오면서 지금만큼 우려스러운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jangj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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