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위로한 뜨거운 울림…정태춘·박은옥의 40년 동행

입력 2019-05-04 06:00  

시대 위로한 뜨거운 울림…정태춘·박은옥의 40년 동행
데뷔 40주년 공연 기립 박수…"우릴 위로한 건 여러분"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산모퉁이 그 너머 능선 위/ 해는 처연하게 잠기어만 가고~'('빈산')
정태춘(65)의 소리가 붓이 되어 쓸쓸한 풍경을 그렸다.
"늙은 목소리로 젊은 날의 노래를 부른다" 했지만, 그의 음이 짚고 간 자리마다 힘 있는 붓 터치가 남았다. 맑은 박은옥 소리가 스미면 단색 화폭엔 엷은 색이 돌았다.
"정태춘 씨는 이 노래를 자신 곡 중 비극적 서정의 백미라고 꼽았어요."(박은옥·62)
선율이 수놓은 풍경에 '풍덩' 빠져있던 객석에 잔잔한 웃음이 피어났다.
부부의 노래 나이 불혹. 음악 동지이자 삶의 동반자로 마흔 개 나이테를 만든 부부는 세월에 단련된 호흡으로 사색의 시간을 안겼다.
지난 2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정태춘-박은옥 부부 데뷔 40주년 기념 공연 '날자, 오리배' 셋째 날 무대가 열렸다. 평일 공연이었지만 600석 공연장은 꽉 찼다.
소박한 무대에 나란히 기타를 잡고 앉은 부부는 자축 술잔을 건네듯 주거니 받거니 노래했다. 남편이 노래하면 부인은 화음을 보태고, 부인 차례에선 남편이 기타 연주를 곁들였다. 박은옥은 말수 적은 남편 대신 곡 사이 노래 뒷얘기와 부부의 지난날을 도란도란 엮어 흐름을 이끌었다.
정태춘이 1집 대표곡 '시인의 마을'을 그윽한 울림으로 선사하자 박은옥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 노래를 듣고 깜짝 놀라 (가수가) 궁금했어요. 우연히 간 레코드사에 정태춘 씨가 있었죠. 첫 대면을 했는데 노란 남방에 목걸이를 하고 있어 실망했어요. 인상이 좋아 착한 사람인가 했는데, 역시 겉모습만 보고는…."
다시 객석에 웃음이 내렸다.


둘은 1980년 결혼했다. 박은옥은 시인이자 노래 운동가로 써 내려간 남편의 노래를 평생 불렀다.
정태춘이 TV 영화에서 영감을 얻은 '회상', 19살 재수 시절 누이 모습을 보고 만든 '양단 몇 마름', 애초 동요로 썼다고 뒤늦게 고백한 '윙윙윙'…. '윙윙윙'은 '뽀로로' 애니메이션에 삽입돼 지금의 4~5살 어린이들이 널리 부르는 동요가 됐다.
박은옥은 "제가 이 노래를 부른 23살 때는 제 딸이 듣고 딸의 딸(손녀)이 듣게 될지 몰랐다"며 "(남편이) 40년 전 곡 줄 때는 아무 말 없다가 사실 동요로 만들었다고 하더라"고 미소지었다.
뜨겁게 노래로 소통하던 정태춘은 15년 전부터 창작에서 손을 뗐다. 그는 사진을 찍고 가죽 공예를 하고 붓글 작업에 매달렸다. "날 위해 만들어주면 안 될까"란 박은옥 요청도 단칼에 잘랐다. 8년이 흘러서야 정태춘은 두 달 만에 아내를 위한 8곡을 만들었다. 절망부터 유토피아까지 관통한 11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2012)다.
"성취감이 있었고 만족스러운 앨범이었죠. 대중성은 생각 안 했어요. 그중 박은옥 씨가 정말 잘 불러줘 감사한 노래가 있는데, '꿈꾸는 여행자'죠."(정태춘)
미세한 떨림까지 투명하게 비치는 박은옥 목소리가 무대 아래로 또르르 떨어졌다. '고비 사막에서 날아온 엽서 한장/ 메마른 글씨들만 흩날리고~.'('꿈꾸는 여행자')


정태춘은 올해 기념 앨범을 내며 신곡 두 곡을 더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연남, 봄날'. 지난 몇 년 힘든 시기를 보낸 가족이 새 보금자리인 연남동에서 "힘을 내자"고 만든 노래다. 이번엔 정태춘의 나직하고 애틋한 격려가 공간을 채웠다.
그러나 부부의 세월은 아름다운 시구로만 채워지지 않았다. 사회 운동 현장을 누비며 변화를 갈망한 투사답게 서사시 같은 기록들이 무대에 올려졌다. 정태춘의 40주년 소회에도 완고한 이상주의자로서 세상과 부딪힌 번민이 담겨있었다.
"당대에 요동치던 시기도, 지리멸렬한 시기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과 연대하고 마음을 열고 새 시대를 상상해온 것에 뿌듯한 마음이 있어요."(정태춘)
정태춘은 자리에서 일어나 '5.18'을 결연한 어조로 불렀다. 1995년 광주 비엔날레에 반해 진보 예술가들이 연 '안티 비엔날레'에 초대됐을 때 '잊지 않기 위하여'란 제목으로 만든 노래다.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태극기 아래 시신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절규하는 통곡 소릴 들었소.' 소리꾼이 후렴구를 함께 했다. 무대 천장의 흰 천이 붉게 물들었다.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부를 땐 정태춘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박은옥은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를 비극적인 서정의 노래로 꼽았다. 이상 실현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노래다. 그는 과거 이 곡을 연습하며 많이 울었다고 했다. 한진중공업 파업 당시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인 김진숙 씨 기사를 접한 뒤였다.


마지막 곡 '수진리의 강'을 부르던 박은옥은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우리 노래가 여러분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준 건 오히려 여러분들이었습니다. 지난 40년간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여러분들의 가수로 살게 해주셔서 영광이었습니다." 관객들은 기립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앙코르 무대에서 부부는 널리 히트한 듀엣곡 '사랑하는 이에게'를 선사했다. '그대 고운 목소리에/ 내 마음 흔들리고.' 부부의 앞날을 축복하듯 객석도 함께 노래했다.
지난달 3일 제주에서 시작된 이번 투어는 7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뒤 부산, 전주, 창원, 강릉 등 하반기까지 20여개 지역으로 이어진다.
mimi@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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