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당 의원 연구모임서 '정부 채무 5경원으로 늘어도 문제없다'
일 언론, '가을 소비세율 인상에 미칠 영향 주목'
(서울=연합뉴스) 이해영 기자 = "자국통화로 돈을 빌릴 수 있는 국가는 통화를 무한정 발행할 수 있기 때문에 재정적자가 커져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이른바 '현대금융이론(MMT. Modern Monetary Theory)'이 일본 정치가들 사이에서도 확산하고 있다.
정부가 막대한 빚을 지더라도 재정파탄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MMT는 미국 주류 경제학계에서 '이단'으로 간주되고 있다.
일본 재무성과 중앙은행인 일본은행도 MMT에 비판적인 입장이지만 일본 집권 자민당의 젊은 의원들이 MMT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은 그동안 소비세율 인상을 2번이나 연기하면서 재정재건 목표 달성시기를 미뤄온 터라 집권당 젊은 의원들의 이런 움직임은 가을로 예정된 소비세율 인상과 관련,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여름에 실시될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세율 인상에 거부감을 느끼는 정치인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7일 아사히(朝日)신문에 따르면 지난달 22일 중의원 의원회관에서 '일본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구모임'이 열렸다. 자민당 젊은 의원들이 일본의 재정문제 등을 공부하기 위해 설립한 모임이다. 10여명의 의원이 참석한 이날 모임에는 현역 경제산업성 관리로 환태평양경제연대협정(TPP) 반대론자로 유명한 평론가 나카노 다케시(中野剛志)가 발표자로 참석했다.
나카노는 미국이나 일본 처럼 자국통화를 발행할 수 있는 정부는 재정파탄을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정부가 필요한 만큼 재정지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재무성이 2002년 외국 신용평가회사에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의 자국통화표시 국채 디폴트(채무불이행)는 생각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MMT는 '사실'에 입각한 것이라서 일본 정부의 채무가 가령 5천조 엔(약 5경 원)이 되더라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5천조엔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계 최악으로 일컬어지는 일본의 현재 채무액의 무려 5배에 해당한다.
그는 이어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부가 채무가 늘더라도 공공사업 등에서 재정지출을 계속해 인플레 상태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정부가 기초적 재정수지(PB)를 재정재건의 지표로 삼을게 아니라 인플레율을 목표로 삼아 일정한 인플레 수준이 되면 재정지출을 중단하면 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플레는 억제하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금융정책 등으로 "간단히 대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연구 모임을 주도한 안도 히로시(安藤裕) 의원에 따르면 참가자들은 "졸지에 믿기 어렵다"는 반응도 일부 있었지만 MMT에 대한 이론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안도 의원은 "경제정책을 입안할 때 화폐의 본질, 조세는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앞으로도 MMT에 대한 이해를 넓혀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재무성은 17일 MMT를 반박하는 데이터를 두루 모은 자료를 '재정제도 등 심의회' 분과위원회에 제출했다. 내년도 예산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국가채무 확대에 대한 낙관론을 반박해 재정건전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다. 자료에는 국가의 세출과 세입, 채무잔고 등의 기본 통계 외에 재정재건이 필요없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데이터들이 담겼다. MMT의 성공사례로 거론되는 일본의 재정주무 부처가 반론자료를 내놓은 셈이다. 재무성의 한 간부는 "MMT는 돈을 무한정 쓰고 싶은 사람이 떠들어 대는 것일 뿐 논평할 가치도 없다"고 일축했다.
그러나 MMT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경제정책인 '아베노믹스'와 통하는 부분도 있다. 2차 아베 정권 출범 직후인 2013년 1월 정부와 일본은행이 '공동성명'으로 제시한 '물가상승률 2%" 목표는 MMT에서 말하는 '인플레율 목표'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일본은 공적채무가 GDP 대비 2배로 팽창했는데도 올해 총 101조4천571억 엔으로 사상 최대 예산을 편성했다. 일본은행의 초저금리로 재정지출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도 재정파탄이 일어나지 않고 일본 국채가격이 폭락해 금리가 급격히 오르지도 않았다. MMT 주창자인 스테파니 켈톤(Stephanie Kelton) 교수는 "일본은 MMT의 좋은 실증사례"라고 말해 일본의 MMT 지지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아사히는 MMT와 같은 '이단'이나 '기책'으로 불리는 경제정책이 일본 국회주변에서 나온 건 처음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리먼 사태 직후인 2009년 재정상황이 어려우면 현재의 지폐인 '일본은행권'과 별도로 정부가 독자적인 '정부지폐'를 발행해 경제정책에 쓰면 된다는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자민당 의원 20명 이상이 "정부지폐 및 무이자 국채발행을 검토하는 의원연맹"을 발족시킨 적도 있다. 이 모임의 고문은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현 관방장관이다. 스가 장관은 당시 TV에 출연해 "100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금융위기인 만큼 모든 수단을 다 강구해도 좋다"고 주장했다.
의원연맹이 마련한 긴급제안에는 정부지폐 발행에 더해 일본은행에 의한 국채 직접 인수와 국채구입 대폭 증액 등 "써서는 안되는 방법"까지 망라한 대담한 금융완화책이 나열됐다. 이중 몇가지는 일본은행의 금융완화책으로 채택된 측면도 있다.
아사히는 아베 정권은 2차례나 소비세율 인상을 연기했다고 지적하고 10월로 예상되는 소비세율 인상도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꺼려하는 정치가도 적지 않은 만큼 MMT를 간단히 "황당무계한 이론"으로 치부해 버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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