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개정 전망도 안갯속…노동계에선 '선 비준' 주장 확산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사회적 대화가 10개월 만에 사실상 빈손으로 끝나게 됐다.
노동존중사회 실현을 위한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인 ILO 핵심협약 비준은 안갯속에 빠졌다.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는 20일 산하 운영위원회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에 관한 합의를 못 내고 논의를 종결한다고 밝혔다.
운영위는 노사정 부대표급 회의체로,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사무총장,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부회장,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부회장, 기획재정부 차관, 고용노동부 차관, 경사노위 상임위원 등이 참여한다.
경사노위는 작년 7월 의제별 위원회인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를 발족해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를 논의했으나 노사 양측의 팽팽한 입장 차이로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급이 높은 운영위로 의제를 올려 지난 한 달 동안 집중적인 논의를 진행했다.
그러나 운영위에서도 합의에 실패해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에 관한 사회적 대화는 사실상 끝나게 됐다. 경사노위는 본위원회를 열어 논의 결과를 정부와 국회 등에 제출하는 방안을 검토할 예정이다.
정부는 ILO 핵심협약 기준에 맞게 국내 노동관계법부터 개정하고 ILO 핵심협약을 비준한다는 이른바 '선(先) 입법 후(後) 비준'의 로드맵을 추진해왔다.
국내 노동관계법 개정은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한다는 게 정부 방침이었다. 경사노위가 사회적 합의에 실패함에 따라 ILO 핵심협약 비준 로드맵의 첫 단추를 끼울 수 없게 됐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집권 초기 ILO 핵심협약 비준을 밀어붙이지 않고 사회적 대화에 맡긴 탓에 '골든 타임'을 놓쳤다는 비판도 제기한다.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끝내 무산된 것은 경영계가 반대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경사노위 산하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가 작년 11월 ILO 핵심협약 기준에 맞게 노동자 단결권을 강화하는 내용의 공익위원 권고안을 발표하자 경영계는 반대급부로 단체교섭과 쟁의행위 제도 개선 문제를 논의할 것을 요구했다.
노사관계 개선위 공익위원들은 지난달 경영계의 요구를 일부 수용한 입장문을 발표했으나 파업시 대체근로 허용과 사용자 부당노동행위 폐지와 같은 핵심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제노동기준뿐 아니라 헌법에도 위배된다는 게 이유였다.
경영계는 단체교섭과 쟁의행위 제도 개선 없이는 ILO 핵심협약 비준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경사노위는 노사의 양보와 타협을 끌어내지 못했다.
ILO 핵심협약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무산됨에 따라 다음 단계인 국회의 노동관계법 개정도 더욱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노동계에서는 정부가 기존 로드맵을 포기하고 국회에 ILO 핵심협약 비준 동의안을 제출해야 한다는 이른바 '선 비준 후 입법' 주장이 확산하고 있다.
특히,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은 ILO 핵심협약 비준 동의안 제출로 정치적 대립 구도가 선명해지면 대중적 투쟁을 벌여 ILO 핵심협약 비준을 끌어낼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정부 여당이 총선을 앞두고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를 새로운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에 따라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됐다. 일각에서는 내년 총선으로 국회가 새로 구성돼야 비로소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의 향방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사회적 대화가 빈손으로 끝나고 국회의 법 개정 논의도 당장 기대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유럽연합(EU)이 ILO 핵심협약 비준의 압박 강도를 높일 가능성도 커졌다.
EU는 한-EU 자유무역협정(FTA) '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장(章)'에 규정된 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 의무를 한국이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며 분쟁 해결 절차에 들어간 상태다.
분쟁 해결 절차 첫 단계인 정부간 협의에서 한국은 경사노위에서 사회적 대화가 진행 중인 점을 내세워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EU 측에 설명했다.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사회적 대화가 결실 없이 끝나고 국회의 법 개정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EU는 분쟁 해결 절차의 마지막 단계인 전문가 패널 소집을 요청할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 패널이 소집되면 한국의 한-EU FTA 위반 여부를 본격적으로 따지게 되고 그 결과에 따라서는 한국이 국제적으로 '노동권 후진국'의 낙인이 찍힐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ljglor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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