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전쟁 와중에 '메이드 인 차이나' 겨눈 중국 미술가

입력 2019-06-01 09:00  

무역전쟁 와중에 '메이드 인 차이나' 겨눈 중국 미술가
사진에 설치·행위예술 접목한 왕칭송, 한미사진미술관 대규모 전시
초기 몽타주부터 군중 작업까지 20여년 소개…"작가 아닌 기자에 가까워"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마을은 전쟁이라도 겪은 듯 폐허가 됐다. 사람들은 다치거나 헐벗거나 굶주렸다. 그 모습은 제각각이지만 절망과 분노, 체념으로 얼룩진 눈빛만은 같다.
그들 사이에 누빔옷을 걸친 채 구부정하게 선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남자의 정체는 이 사진을 찍은 중국 현대미술가 왕칭송(53)이다.
작가는 2018년 2월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하이랜드파크를 방문했다. 한때 세계 자동차 산업의 중심이었던 도시는 급격히 몰락했다. 매일 땅이 파헤쳐지고 건물이 들어서고 공장이 돌아가는 베이징 차오장디 풍경을 기억하는 작가는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을 것이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 한미사진미술관에 걸린 3m 대작 '더 블러드-스테인드 셔츠'는 작가가 하이랜드파크 주민 100여명을 폐공장으로 초대해 촬영한 작업이다.
지난달 31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중국이여 세계로 향하라! 세계로 중국을 배우라!'고 부르짖는 사진 속 플래카드를 가리켰다.
"느낌표를 물음표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제조업으로 번성하던 미국 도시가 이렇게 황량해졌는데, 중국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물음표로 말이죠."
사진 속 작가 누빔옷은 '메이드 인 차이나' 브랜드 수백 개의 라벨을 모아 꿰맨 것이다. 미·중 무역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미국의 몰락한 제조업 도시에서 '메이드 인 차이나'를 입고 카메라 앞에 뛰어든 왕 작업은 그만큼 흥미롭게 다가온다.



왕칭송은 원래 회화 작가였으나, 2000년대부터 사진에 설치미술과 행위예술을 접목한 작업을 선보여 전통 다큐 사진에 매몰됐던 중국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왕칭송 작업에는 1966년 중국 헤이룽장성 다칭의 유전(油田) 노동자 부모 아래서 태어나, 유전 사고로 숨진 아버지를 대신해 15살 때부터 굴착 플랫폼에서 일했던 삶이 녹아 있다.
그는 1978년 개혁개방 선언 이후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을 생생하게 지켜봤다. 20대 중반에야 쓰촨미술학교에 입학해 회화를 전공했지만, "중국의 변화 속도를 포착하려면 회화보다는 사진이 더 적합하겠다"라는 생각에 1999년 붓을 내려놓았다.
초반에는 자신의 모습을 디지털로 합성한 포토몽타주 작업을 했으나, 2000년 이후부터는 연출된 스튜디오에서 수십, 수백 명 모델과 함께 촬영하는 작업 중이다.
1일 개막한 한미사진미술관 전시 '더 글로리어스 라이프'는 20여년의 사진 작업 중 40여점을 추려 선보이는 전시다. 중국식으로 '생활예찬'인 전시 제목은 황홀경 안에서도 정작 방향을 찾지 못한 채 휘청대는 중국 사회를 은유한다.



가슴을 완전히 드러낸 여성들 앞에 엎지른 우유를 둔 '세이프 밀크'는 2008년 중국을 뒤흔든 멜라민 분유 파동에서 출발했다. '팔로우' 연작은 참지식을 추구하기보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데만 몰입하는 중국 교육의 폐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이상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것, 직시하고 관찰한 것에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스스로를 예술가보다는 지속적으로 사회 현장을 담는 기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한미사진미술관 인터뷰 중)
과장되게 연출한 세트에서 펼쳐진 풍경은 관람객을 압도한다. 그런데도 작업이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밑작업에만 길게는 수년씩 걸릴 정도로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치밀함 덕분이다. 작가 또한 마치 그곳에 있었던 인물처럼 자연스럽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등 고전 명화에서 따온 장치들을 발견하는 것도 작업을 감상하는 재미 중 하나다.
2003년 개관한 한미사진미술관이 중국 작가를 소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석재현 씨가 전시 기획을 맡았다.
전시는 8월 31일까지. 성인 6천 원.
air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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