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외주화' 여전하고 처벌 하한선도 없어
정부·전문가 "노동자에 치명적 화학분야 우선"
(서울=연합뉴스) 탐사보도팀 오예진 기자 = "'김용균법'에는 김용균이 없다"
28년만에 전면 개정돼 내년 1월 시행을 앞둔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일명 김용균법)에 대한 고(故) 김용균씨 유족과 노동계의 주장이다.
이 개정법의 정부안은 '구의역 김군 사망사건' 한 달 후인 2016년 6월에 국회에 제출됐으며, 오랜 줄다리기 끝에 태안화력 김용균씨 사망사건 보름여만인 작년 12월 말에 개정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법 개정 시작과 끝자락에서 발생한 20대 청년 두 명의 죽음이 법안 통과의 동력이 되기는 했지만, 최종 결과물인 개정법은 이들의 죽음을 외면하고 있다고 유족과 노동계는 주장한다.
김용균이 엄마와 동료에게 남긴 숙제 / 연합뉴스 (Yonhapnews)
◇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있으나 마나"
지난해 12월 태안화력에서 컨베이어 벨트 점검을 하다 사망한 김용균씨와 지난 2016년 5월 서울 지하철 7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작업 중 숨진 노동자 '구의역 김군'은 개정법에서도 보호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유족과 노동계의 주장이다.
두 죽음의 근본 원인인 '위험의 외주화'를 막으려면 산업재해가 빈번하거나 사고 가능성이 높은 업종들은 도급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데, 도급 금지 및 승인 조건에 관한 조항에는 이들이 속한 업종이 빠졌다는 것이다.
개정법의 도급 금지 규정인 58조는 ▲도금작업 ▲수은·납·카드뮴의 제련·주입·가공·가열 작업 ▲디클로로벤지딘, 비소, 염화비닐 등 12개 허가대상물질의 제조·사용작업만을 대상으로 꼽고 있다.
이어지는 59조는 도급을 하기 위해 정부의 승인이 필요한 작업을 '유해하거나 위험한 작업 중 급성 독성, 피부 부식성 등이 있는 물질의 취급'으로 제한했다. 시행령에서는 이를 '1% 이상의 황산, 불산, 질산, 염산을 취급하는 설비를 개조·분해·해체·철거하는 작업으로만 규정했다.
철도와 발전설비뿐 아니라 하청 산재 사고율이 높다는 조선이나 건설업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나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연구원은 "정부에서 김용균 님의 사고 때문에 굉장히 경각심을 갖고 28년 만에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해서 보호 대상으로 삼지 못했던 대상들을 포함하는 것처럼 하고 있지만, 사실 그런 안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도급인이나 사업주가 법을 어겼을 때 처벌이 전보다는 강화됐지만 아직도 미흡해 실효성이 부족하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은 근로자 사망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업주에게 7년 이하 징역이나 1억원 이하의 벌금을 내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개정법에는 여기에 5년 내에 같은 죄를 지은 사업주에 대해서는 형을 2분의 1까지 가중할 수 있는 조항이 추가됐다.
또 도급인이 안전·보건 조치를 어겼을 때 1년 이하 징역이나 1천만원 이하 벌금을 매기는 현행법 조항은 개정법에서 징역 3년 이하나 벌금 3천만원 이하로 강화됐다.
법인과 사업주에게 같은 금액의 벌금을 부과하던 조문도 사업주나 도급인에게 10억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하지만 처벌에 하한선을 두지 않아 실효성이 없을 우려가 크다는 비판이 유족들과 노동계에서 나온다.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49) 씨는 "(산업재해 방지를 게을리한 이들이) 정말 책임을 져서 벌을 제대로 받길 원하는데, 사고 책임자들 처벌하는 하한선이 예나 지금이나 너무 약해서 있으나마나 한 벌"이라고 지적했다.
전국교수노동조합·민주화를위한교수협의회 등 단체 회원인 대학교수 330명은 올해 1월 낸 성명서에서 "개정안은 이전 법과 동일한 효과를 내 사업주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고 비판했다.
◇ '김용균'은 어쩌다 김용균법에서 빠지게 됐나
유족과 노동계가 '반쪽짜리'라고 비판하는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을 탄생시키기까지 정부의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정부와 노동계의 시각은 출발점부터 눈높이가 서로 달랐다.
정부는 2016년 구의역 사고가 나자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을 통해 '유해·위험작업에 대한 재하도급 제한 방안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철도와 조선 등을 도급 제한 대상에 포함할지 여부를 검토하도록 했다.
그해 12월에 나온 연구보고서는 철도 스크린도어 정비·보수 작업에 대해 "대부분 지하철 관련 공기업이 원청이며 현재 직영으로 전환되는 추세임을 감안해 하도급 금지가 별도로 필요한지 실효성이 의문"이라며 부정적 견해를 밝혔다.
이 보고서는 조선업의 하도급 금지에 대해서도 "인력공급 및 선박제조공정 전반에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 예상된다"며 "암묵적으로 이뤄지는 하도급을 양성화"해야 한다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결론을 내렸다.
대신 "면접에 참여한 화학 공장에서는 도급인가 확대에 관한 별다른 의견이 없었고, 하도급 제한 및 금지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응답을 얻었다"며 "화학 설비 정비·보수 작업에서 원청의 안전보건상 조치의무 및 책임 강화 필요"라는 결론을 제시했다.
도급과 하청을 통한 '위험의 외주화'가 심각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구의역 사고를 계기로 확산하고, 철도 유지·보수에 대한 도급의 위험성이 널리 알려진 가운데 행해진 연구였으나, 화학 분야를 제외하면 도급 제한은 그리 크게 확대되지 않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박근혜 정부 당시 나온 이런 결론은 문재인 정부에서도 거의 그대로 유지됐다.
정부는 문 대통령 취임 석 달 후인 2017년 8월 총리실과 고용노동부 등 6개 관계부처 합동으로 '산업재해를 획기적으로 감소시키기 위한 혁신방안'을 발표하고 동시에 '중대 산업재해 예방대책'을 의결했다.
당시 발표자료를 보면 도급 금지와 관련해 "수은 제련 등 유해·위험성이 특히 높은 작업은 원청이 직접 수행하도록 한다"는 방침이 포함돼 있다.
정부의 이런 방침은 지난해 2월 전면개정안 발의와 10월 국무회의 통과는 물론이고 태안화력 사고 이후인 12월 국회 본회의 논의 과정에서도 줄곧 유지됐다.
◇ 화학·위험물질은 도급 금지가 법제화됐지만…
이런 방침 결정에는 정부의 행정적 판단과 경영계의 반발, 그리고 국회 통과 과정에서 겪은 진통이 주요 배경으로 꼽힌다.
현행법의 시작인 1990년 법 개정의 계기가 15세에 수은 중독으로 사망한 노동자 문송면 사건과 섬유업체 원진레이온의 집단 이황화탄소 중독 사태였다. 우리나라에서 '산업재해'를 심각하고 위험한 사안으로 여기게 된 계기가 화학 분야에서 생겼던 것이다.
정부는 지난 1월 내놓은 개정법 설명자료에서 "현행 도급인가 대상 작업은 직업성 암 등 중증질환 이외에도 중추마비, 신경장해 등 노동자 건강에 치명적 영향을 미치고 단시간에 직업병을 발견하기 어렵다"며 금지 대상으로 선정한 이유를 밝혔다.
고용노동부에서 개정안 마련 작업을 진행한 한 실무자는 "도급 금지와 관련해 찾아봤을 때 가장 우선순위가 화학·위험 물질"이었다면서 "도급 인가 제도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어서 민주노총에서도 도급 금지에 대한 요구가 있었고, 사업주들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고 전했다.
이렇게 화학 분야를 중심으로 제한적으로만 도급 금지를 법제화해야 한다는 판단은 상당수 전문가의 의견으로 뒷받침이 됐다.
개정법 마련에 참여한 전형배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산재 예방에 성공해서 사망자 수가 적은 나라의 법제를 살펴봤는데 어느 나라도 작업 자체의 도급을 금지하는 입법을 하지 않았다"며 "대신 산업안전감독관의 권한이나 기업에 대한 벌금이 엄청나게 높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도급 금지가 문제가 아니라 도급을 했더라도 원청에 대해서 강력한 책임을 물으면 사망사고가 줄어든다"고 강조했다.
도급 금지 범위를 크게 늘리지 않기로 한 판단에는 경영계의 거센 반발도 한몫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영계는 지난해 2월 개정안 발표 직후부터 정부의 개정안이 과도하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꾸준히 고용노동부와 국회에 전달하고 관련 토론회를 여는 등 거세게 반발해왔다.
이 과정에서 결국 사업주에 대한 징역형에 하한을 두는 조항은 빠졌다. 정부가 경영계로부터 상당한 압박을 받았음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개정안에 대한 진통은 국회통과 과정에서도 이어졌다. 지난해 12월 19일 고용노동소위원회 1차 회의를 시작으로 법안이 본회의를 통과한 27일까지 6차례의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막판으로 갈수록 핵심쟁점을 두고 여야 간 의견 차이로 정회와 속개를 반복하는 등 쉽사리 합의가 이뤄지지 않다가 27일 오후 9시가 넘어서야 겨우 본회의를 통과했다.
김용균 씨 사고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어머니 김미숙 씨가 연일 국회를 찾아가는 등 여론을 움직인 힘 덕택에 법 통과는 됐지만 유족이나 노동계의 기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 것이다.
정부 논의과정에 참여한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은 "경총은 당연히 압박을 하겠지만 그러더라도 (고용노동부가) 사회적 분위기를 읽고 (제도를) 더 넓혀야 하는데 스스로 행정 능력 등에 많이 갇혀 있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이어 "애초에 문재인 정부가 강력히 하겠다는 취지를 밝혔던 건데 대상과 기준을 찾는 과정에서 계속 후퇴 일로를 겪어 왔다"면서 "당초부터 생색내기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라고 꼬집었다.
ohye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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