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전쟁 격화에 3년만에 금리인하 여지 연 한은 총재

입력 2019-06-12 08:00   수정 2019-06-12 10:39

무역전쟁 격화에 3년만에 금리인하 여지 연 한은 총재
"인하 검토 안 한다" 입장서 후퇴…"상황변화에 적절 대응"
지난주 美연준 의장 발언과 판박이…당장 인하보단 추이 살필 듯



(서울=연합뉴스) 이지헌 정수연 기자 =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11일 미중 무역분쟁과 반도체 경기 악화를 우려하며 "경제상황 변화에 따라 적절히 대응해 나가야 하겠다"고 언급한 것은 금리인하 요구에 명확히 선을 그어왔던 기존 입장에서 한발 물러선 것으로 풀이된다.
당장 단기간 내 금리인하를 고려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상황 변화에 따라 추후 금리인하를 검토할 수 있음을 시사한 발언이어서 한은이 연내 기준금리를 내릴 것이란 금융시장의 기대감이 한층 높아질 전망이다.
이 총재는 이날 오전 한은 창립 제69주년 기념사에서 통화정책과 관련해 "최근 미중 무역분쟁, 반도체 경기 등 대외 요인의 불확실성이 크게 높아진 만큼 그 전개 추이와 영향을 면밀히 점검하면서 경제상황 변화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해 나가야 하겠다"고 말했다.
"지금은 기준금리 인하로 대응할 상황은 아직은 아니다"라며 시장의 금리인하 기대와 거리를 뒀던 기존 기조와는 확연히 온도 차가 느껴지는 발언이다. 이 총재는 불과 12일 전인 지난달 31일 금융통화위원회가 금리를 동결한 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도 이처럼 말하며 "입장 변화가 없다"고 했다.

이 총재의 기념사 중 '면밀한 점검', '적절한 대응' 언급은 지난 4일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한 발언을 떠올리게 한다.
파월 의장은 당시 통화정책 콘퍼런스 연설에서 미중 무역전쟁발 경기둔화를 우려하며 "미국의 경제전망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하게 주시하고 있다. 경기확장 국면이 유지되도록 적절하게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시장은 이 발언을 금리인하 신호로 해석했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에 따르면 지난 11일 연방기금(FF) 금리선물 시장은 연준이 연내 금리를 인하할 가능성을 97.5%로 반영했다.
파월 의장의 발언이 나오고 시장이 강하게 금리인하 기대감을 보인 지 일주일 만에 이 총재도 비슷한 키워드의 언급을 한 것이다.
금융시장의 기준금리 인하 기대감은 이 총재의 '인하 미검토' 기조와 별개로 한 달여 전부터 고조돼왔다.
지난 4월 25일 1분기 경제성장률이 전 분기 대비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으로 발표된 이후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줄곧 기준금리(연 1.75%)를 밑돌고 있다. 이달 들어서는 만기 10년 이상 장기 국채 금리도 기준금리 밑으로 떨어졌다.

금리인하를 주문하는 정책제언도 전방위적으로 나왔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달 경제전망 보고서를 내며 정부의 확장적 재정정책에 통화당국도 보조를 맞출 것을 권고했다. KDI 전망에 앞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제통화기금(IMF)도 한국에 완화적 통화정책을 주문했다.
지난달 31일 금통위 회의에서 조동철 금통위원이 기준금리를 내려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내면서 금리인하 기대감은 극에 달했다. 이 총재가 기자간담회에서 "소수의견은 말뜻 그대로 소수의견"이라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지만, 시장은 소수의견 출현을 인하 징후로 해석했다.
미국 이외 국가들의 통화완화 행렬 참여도 늘었다. 호주 중앙은행은 지난 4일 성장동력 저하와 저물가를 이유로 3년 가까이 연 1.5%로 동결해 온 기준금리를 연 1.25%로 낮췄다.
호주는 한국처럼 중국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대표적인 국가로 꼽힌다. 한은도 호주의 금리 인하 결정 배경을 면밀히 분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기의 하방위험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우려는 최근 청와대 핵심 참모에게서도 나왔다.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은 지난 9일 기자간담회에서 "성장의 하방 위험이 커진 상황이라서 보다 적극적인 정책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은이 금리를 마지막으로 인하한 시점은 2016년 6월(연 1.25%)이 마지막이다. 그 뒤로 2017년 11월과 지난해 11월 한 차례씩 금리를 올리기만 하다가 마지막 인하 결정 후 3년 만에 다시 정책기조 전환 가능성을 시사한 발언이 나온 셈이다.
이날 이 총재 발언이 어디까지나 미중 무역전쟁 심화와 반도체 회복 지연을 전제로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금통위가 한두 달 새 곧바로 정책 기조를 바꾸기보다는 당분간 경제 여건 추이를 지켜볼 것으로 예상된다.
금통위는 지난달 31일만 해도 통화정책 회의 결정문에서 경제성장 전망경로에 대해 "지난 4월 (발표한) 전망경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주요 연구기관들이 줄줄이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낮춘 가운데 한은도 7월 중순 발표 예정인 경제전망 보고서에서는 2.5%로 제시했던 전망치를 다시 하향 조정할 가능성이 크다.
무역분쟁에 따른 세계 성장률 하락과 반도체 경기회복 지연 가능성은 주요 투자은행(IB)과 경제분석기관에서도 시각을 같이하는 지점이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최근 JP모건이 올해 세계 성장률 전망을 3.4%에서 3.2%로 하향 조정하는 등 지난달 말 기준으로 성장 전망치를 집계한 주요 9개 IB 가운데 5곳이 한 달 새 전망치를 0.1∼0.2%포인트씩 낮춰 잡았다.
세계반도체시장통계기구(WSTS)는 지난 4일 보고서에서 올해 세계 반도체 시장 매출이 4천120억달러로 작년보다 12.1%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감소율을 3%로 내다봤던 2월 보고서 작성 때보다 상황이 더 악화했다고 본 것이다.
p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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