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징계→기강해이→사고→경징계
성적 지상주의가 낳은 빙상계 사고 공식
(서울=연합뉴스) 김경윤 기자 = "선수가 사고 치면 대한빙상경기연맹(관리위원회)은 감싸기에 바빠요. 일단 국제대회에서 성적을 내야 하니까요. 사고 친 선수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금방 복귀해요. 이 과정을 본 주변 선수들은 무서운 게 사라집니다. 선수들의 기강은 해이해질 수밖에 없고, 비슷한 사고는 또 반복돼요."
수도권 빙상 실업팀 A 감독은 빙상계에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단순히 선수들의 인성 문제와 개별 문제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A 감독은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계속된다는 것은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A 감독의 말처럼 빙상계, 특히 효자종목 쇼트트랙에서 선수들의 기강 문제와 연맹의 솜방망이 처벌 논란은 끊이질 않았다.
불과 4개월 전 쇼트트랙 남자 국가대표 김건우(21·한국체대)의 여자 숙소 출입 사건 때도 그랬다.
김건우는 여자 대표팀 김예진(20·한국체대)을 만나기 위해 진천선수촌 여자 숙소에 들어갔다가 발각돼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연맹은 두 선수에게 이해하기 힘든 가벼운 징계를 내렸다.
김건우는 고작 출전정지 1개월 징계 처분을 받았다. 김건우에게 여자 숙소 출입 스티커를 받을 수 있도록 도운 김예진은 견책 처분에 그쳤다.
두 선수는 차기 시즌 국가대표 선발전 출전 자격도 유지했다. 사실상 징계의 의미가 없었다.
특히 김건우는 2015년 고등학생 신분으로 태릉선수촌에서 외박을 나와 음주한 게 밝혀져 국가대표 자격 일시 정지의 징계를 받았고, 2016년엔 스포츠 도박 사이트 베팅 혐의로 또다시 대표팀 자격정지 징계를 당한 전력이 있었다.
그런데도 연맹은 선수 감싸기에 급급했다.
연맹의 솜방망이 처벌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징계도 비슷했다.
2004년 쇼트트랙 여자 대표팀 주축 선수 6명은 코치진의 심각한 구타와 폭언에 시달리다 태릉선수촌을 집단 이탈했다.
2005년엔 코치진 선임에 반발한 남자 대표선수들이 태릉선수촌 입촌을 집단으로 거부해 논란이 됐다. 그러나 문제를 일으킨 코치 대부분은 가벼운 처벌을 받고 빙상계로 복귀했다.
선수, 지도자 등 쇼트트랙 대표팀 구성원들의 문제의식은 오래전부터 옅어졌다.
성적만 내면 어떤 사고를 일으켜도 큰 문제 없이 복귀할 수 있다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렸다.
조재범 전 국가대표 코치의 성폭행 혐의 논란으로 빙상계가 발칵 뒤집힌 뒤에도 이런 인식은 바뀌지 않았다.
25일 알려진 쇼트트랙 남자대표팀 간판선수의 성희롱 논란도 비슷한 흐름으로 처리될 것이라는 예상이 짙다.
이 선수는 암벽 등반 훈련 중 장난으로 다른 선수의 바지를 내렸다. 수치심을 느낀 선수는 선수촌에 성희롱을 당했다며 신고했다.
문제가 공론화되자 대한체육회와 진천선수촌은 24일 오후 기강 해이를 이유로 쇼트트랙 대표팀 전원의 퇴촌을 결정했다.
대한빙상경기연맹 관리위원회는 향후 스포츠 공정위원회를 열어 관계자 징계 절차에 들어갈 예정이다.
많은 빙상인은 이번에도 연맹이 관계자들에게 경징계를 내릴 것이라고 예상한다.
한 빙상인은 "연맹은 이번에도 경징계를 내릴 것"이라며 "연맹엔 싹을 도려내 사건·사고를 예방하는 것보다 국제대회 성적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cycl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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