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52시간 1년] ① "퇴근하라고 눈치줘요" 직장인들 달라진 하루

입력 2019-06-29 08:31  

[주52시간 1년] ① "퇴근하라고 눈치줘요" 직장인들 달라진 하루
오후 6시 '땡' 치면 PC 전원 차단…퇴근 이후 운동·자격증 공부
주52시간 적용 못 받는 중소기업 직원들 "'칼퇴'는 딴 세상 얘기"



(서울=연합뉴스) 홍국기 최평천 최재서 기자 = #1. 오후 6시 한 대기업 사무실. 상사가 "왜 아직도 퇴근을 안 한 거야"라며 부하 직원들을 질책했다. 과거 야근을 암묵적으로 종용하던 회사는 주52시간 근무제 시행 이후 퇴근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눈치를 준다. 해가 지면 사무실 불도 꺼지고, 직원들도 아무도 남지 않게 됐다.
#2. 영업이 끝난 오후 4시 은행. 은행원의 '진짜 업무'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간이다. 과거 오후 8~10시까지 일을 하던 은행원들은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이후에는 '칼퇴근'을 한다. 오후 6시 정각이면 업무용 PC의 전원이 자동으로 차단된다. 더 일하고 싶은 자유도 용납 안 된다.
#3. 오후 7시 서울 서대문구의 한 피트니스센터는 직장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저녁 있는 삶'을 찾은 직장인들은 야근 대신 운동에 한창이다. 온전한 자기만의 시간을 갖게 된 직장인들로 피트니스센터는 하루하루가 신년 벽두처럼 것처럼 붐빈다.
다음 달 1일이면 주 52시간제가 시행된 지 1년이 된다. 숨 가쁘게 살아온 직장인의 생활에 한층 여유가 생겼다. 미혼 직장인들은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됐고, 기혼이나 자녀가 있는 이들은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었다.
건설사에 다니는 강모(37)씨는 퇴근 후 프로젝트관리전문가 자격증 취득을 위한 공부를 한다. 강씨는 29일 연합뉴스와 한 통화에서 "퇴근 시간에 상사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고, 사내 자율성도 이전보다 훨씬 커졌다"며 주 52시간제에 큰 만족감을 보였다.
다른 건설사에서 일하는 워킹맘 A(34)씨 역시 "'친정엄마 찬스'를 써야 하는 경우가 줄었다"며 주52시간제를 반겼다.
그는 "전에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를 집에 데려오고 퇴근 전까지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 친정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면서 "주52시간제 시행 이후 야근이 줄고 퇴근 시간도 일정해지면서 직접 아이를 데려온다"고 했다.
전자업체에 다니는 B씨는 인사팀으로부터 '기분 좋은 감시'를 받는다고 전했다. B씨는 "52시간 이상 일하고 싶어도 불가능하다"며 "출퇴근 때 게이트를 통과하면 시간이 기록되고 인사팀이 모니터링한다. 초과 근무 가능성이 보이는 직원에게는 따로 연락해 경고까지 한다"고 말했다.


대다수 대기업에서는 주52시간제 근무제 시행 이후 오후 6시면 업무용 PC 전원을 차단한다. 임원에게 야근을 신청하고 허가를 받아야 컴퓨터를 다시 켤 수 있다.
일을 더 하고 싶어도 못하는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지만, 직장인들은 대체로 만족감을 드러냈다. 특히 야근이 줄면서 자연스럽게 회식도 줄어들었고, 불편한 상사와의 자리가 줄어든 점을 제도의 가장 큰 혜택으로 여긴다고 한다.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43)씨는 "주52시간이 철저하게 지켜지면서 저녁을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다"면서 "일주일에 하루, 이틀이 더 생긴 것 같다. 주5일제 도입 이후 가장 혁명적인 변화"라고 말했다.
주 52시간 시행으로 피트니스 센터를 찾는 직장인들도 늘었다. 직장인 권모(29)씨는 "과거에는 야근을 언제 할지 몰라서 저녁에 따로 약속을 잡기 어려웠다"며 "지금은 동네 피트니스 센터에서 요가 같은 프로그램을 마음 놓고 즐긴다"고 했다.
최근 운동하는 재미에 빠졌다는 이모(31)씨는 "주위에서 시간이 남으니 운동이라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생겼다"면서 "필라테스를 시작한 동료도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주52시간제에 '빛'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직장인들은 일은 예전 그대로 하면서도 수당을 받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고 하소연했다. 또 짧은 근무시간으로 업무 강도가 높아져 스트레스가 심해졌다는 직장인들도 있다.
전자회사 연구개발원인 이모(37)씨는 "저녁 있는 삶은 좋지만, 업무의 효율성을 고민해야 한다"면서 "과거에는 야근 수당을 받으며 일했는데 요즘은 야근 수당을 받지 못하고 일한다"고 토로했다.
선택적 근로시간제가 함께 도입되면서 직장 내 소통이 부족해졌다는 의견도 있었다. 직장인 C씨는 "누가 출근하고, 누가 퇴근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며 "막상 찾을 때 자리에 없는 경우가 있어 불편하다"고 말했다.
짧아진 근무시간과 함께 줄어든 월급에 대한 불만도 나왔다. 자동차 공장 관리직인 D(25)씨는 "초과 근무로 돈을 더 벌고 싶어도 일을 못 해서 아쉬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연장 근무가 사실상 금지되면서 일의 연속성과 효율성이 떨어졌다는 직장인도 있었다.
대체로 만족감을 드러낸 대기업 직장인들과 달리 현재까지 주52시간제 시행 대상이 아닌 중소기업 직장인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도 했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이모(38)씨는 "우리 회사는 오후 6시가 돼도 컴퓨터가 꺼지지 않는다"면서 "주52시간제 관련 시스템이 전무하다. 저녁 있는 삶은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라고 하소연했다.
pc@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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