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달착륙 50주년] 다시 돌아본 달착륙…美蘇경쟁이 연료역할

입력 2019-07-01 08:03   수정 2019-07-01 08:57

[인류 달착륙 50주년] 다시 돌아본 달착륙…美蘇경쟁이 연료역할
케네디, 소련에 뒤진 우주기술 만회위해 추진…실패 통한 기술축적 끝 성공

(샌프란시스코=연합뉴스) 정성호 특파원 = 1969년 7월 21일 그리니치 평균시(GMT) 기준 오전 2시 56분(미국 동부시간 20일 오후 10시 56분). 아폴로 11호의 선장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발을 디뎠다.
암스트롱은 달 위를 걸으며 "이는 한 사람에게는 작은 발자국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수사는 과장이 아니었다. 인류가 사상 처음으로 지구가 아닌 외부 천체에 발을 내디딘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지구에서 잉태돼 번식하고 진화해온 인류가 과학기술의 힘을 빌려 제 고향 땅이 아닌 다른 별에 간 것이다.


암스트롱은 그렇게 달을 밟은 첫 인간이 됐다. 그로부터 약 20분 뒤 같이 달 탐사선 '이글'을 타고 온 에드윈 올드린도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달에 착지했다.
이글이 착륙한 곳은 '고요의 바다'라고 이름 붙여진 얕은 달 분화구였다. 두 사람은 달 표면에 미국 국기를 꽂은 뒤 월석(月石)과 흙 표본 등을 수집했다.
2시간 넘게 수집 작업을 한 이들은 47파운드(약 21.3㎏)의 채취물을 싣고 다시 이글에 올라탔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이글이 달에 착륙해 머문 시간은 9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짧은 여행을 위해 숱한 실패와 시행착오, 그리고 위기의 순간을 넘겨야 했다.
일례로 TV로 중계된 화면 속 이글은 평화롭고 안전하게 달에 착륙했지만 이글은 당시 착륙용 연료가 20초 분량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20초만 착륙이 지연됐더라면 인류 최초의 달 착륙이 몇 달 혹은 몇 년 뒤로 늦춰졌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치열하게 전개된 우주 경쟁에 불을 지핀 연료는 익히 알려진 대로 미국과 소련(현재의 러시아)의 체제 경쟁이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소 간에 전개된 미사일 기반 핵무기 경쟁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기도 했다.
우주 경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1957년 소련이 쏘아 올린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였다. 이 예기치 못한 사건은 소련에는 자랑거리였지만 미국에는 충격이었다.
당시 소련은 미국보다 로켓 기술력에서 앞서 있었다. 특히 96분마다 한 번씩 지구 궤도를 돌며 무선표지(radio beacon)를 발신하는 스푸트니크 1호는 전 세계에 소련 체제의 기술적 우위를 과시하는 상징물과도 같았다.
소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1961년 4월 유리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우주 비행에 성공하면서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됐다.
우주 기술에서 미국의 열위는 명백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에게는 미국의 지도력을 입증할 반전 카드가 필요했다.
케네디 대통령 스스로 착륙 없이 달 주변을 비행하는 임무나 달 궤도에 우주연구실을 설치하는 임무 등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더 강력한 로켓을 가진 소련에 유리한 사업들이었다.
그러다 나온 아이디어가 인간의 달 착륙이었다. 당시 부통령이던 린든 존슨은 이 임무는 미국이 먼저 달성할 수 있다며 인간의 달 착륙을 제안했고, 이것이 바로 아폴로 계획이 됐다.
전인미답의 영토인 달에 인류가 착륙하는 장면은 고스란히 미국이 상징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기술력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증명사진으로 여겨졌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5월 1960년대가 가기 전 사람을 달에 착륙시켰다 지구로 귀환시키는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케네디는 감세 정책 속에서도 우주 예산은 살리고 미 항공우주국(NASA)의 다른 예산을 이 사업에 전용하며 지원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 뒤 존슨이 대통령을 맡으며 이 사업을 지켜낸 것도 아폴로 계획의 성공에 기여했다.
달 착륙은 또 무수한 기술적 실패의 축적이 낳은 결실이기도 했다. 유인 달 탐사 이전 미국은 1958년부터 무인 달 탐사 프로그램인 '파이오니어'와 '레인저'를 가동했다.
그러나 1964년까지 이어진 15차례의 무인 달 탐사 임무는 모조리 실패했다. 부가 임무를 달성한 경우도 있긴 했지만 주 임무는 모두 실패했다.
인명 희생도 뒤따랐다. 아폴로 1호는 1967년 1월 훈련연습 중 우주선 안에서 화재가 발생하며 우주인 3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로 인해 아폴로 계획이 1년 반 이상 중단되기도 했다.
1966년 서베이어 1호가 성공적으로 달에 연착륙하면서 미국은 기술력에서 소련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다음 과제는 우주선이 달 궤도를 따라 비행할 수 있는 기술의 확보였다. 그전까지는 지구에서 달로 곧장 가는 경로를 따랐지만 이는 우주선이 달에 충돌한다는 것을 뜻했다. 이래서는 우주선이 지구로 돌아올 수 없었다.
유인 달 탐사는 또 더 많은 과제를 안고 있었다. 지구로 돌아오기 위한 추가 연료를 실어야 했고, 이는 우주선의 무게가 크게 증가한다는 것을 뜻했다.


이 막대한 양의 지구 귀환용 연료를 달까지 가져가는 일도 비효율적이었다. 연료를 실은 채 달의 중력을 거슬러 착륙한 뒤 다시 달 중력을 거슬러 이를 우주로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다.
'달 궤도 랑데부'라는 아이디어가 돌파구가 됐다. 연료를 실은 사령선이 달 궤도를 도는 동안 달 착륙선이 달에 내려가 임무를 수행한 뒤 다시 사령선과 도킹해 지구로 돌아오는 방식이었다.
이런 기술적 허들을 넘기 위해 미국은 여러 대의 무인 달 궤도선을 보내 달 궤도 비행을 위한 기술을 습득하는 한편 전체 달 표면에 대한 광범위한 지도도 제작해야 했다.
1969년 7월 16일 미 플로리다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아폴로 11호가 발사됐다. 우주선에는 암스트롱과 올드린 외에도 사령선(코맨드 모듈)에 남아 이를 조종할 마이클 콜린스 등 3명이 탑승해 있었다.
발사 나흘 뒤 아폴로 11호가 달 표면에 근접하자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달 탐사선 이글로 옮겨탔다. 무사히 임무를 마친 이들은 7월 24일 지구로 안전하게 돌아왔다.
이들의 귀환은 인류가 달까지 여행한 뒤 지구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는 기술을 획득했음을 뜻했다. 이들 이후로 10명의 우주인이 1972년까지 달을 다녀왔고 우주 탐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sisyph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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