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국적자에 과세하는 규정 탓…美세무당국, 英 금융기관에 납세 정보 요구
英정치권 "미국과 관계 단절된 영국 국민의 이중 납세는 부당"
(서울=연합뉴스) 현윤경 기자 = 미국의 이중국적자 과세 정책 때문에 미국에서 태어난 수만명의 영국인이 영문도 모른채 금융 계좌 동결 위기에 처했다.
영국 언론 가디언은 25일(현지시간) 미국 세무 당국의 강한 압박 때문에 미국에서 출생했지만 몇개월 혹은 몇 년 안돼 미국을 떠난 영국민들이 난처한 처지에 놓였다고 보도했다.
영국 케임브리지에 사는 74세의 여성 연금 생활자는 최근 바클레이 은행으로부터 미국의 납세번호를 제출할 것을 요구하는 긴급 서한을 받았다.
바클레이 은행은 미국 국세청(IRS)의 요청으로 미국에서 출생한 영국 내 고객에게 이 같은 편지를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생후 18개월이던 1947년 미국을 떠난 이 여성은 자신의 미국 시민권이 소멸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편지를 받고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여성처럼 단 하루도 미국에서 일하지 않고도, 단지 미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영국 내 금융 기관으로부터 미국 납세번호를 넘겨주지 않으면, 자산이 동결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는 영국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가디언은 밝혔다.
영국 금융 기관들은 미국과 영국 이중 국적 고객들과 거래하면서, 미국 IRS와 과세 정보 등을 공유하지 않으면 막대한 벌금을 부과할 것이라는 미국 당국의 으름장에 떠밀려 고객들에게 이 같은 서한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1986년 이전에 출생한 뒤 수개월 또는 수년 뒤 미국을 떠난 사람들의 경우 납세번호나 사회보장번호(SSN)를 발급받지 못했지만, 남은 평생 미국에도 세금을 낼 의무가 있다는 통보를 받는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다.
이 같은 일은 미국이 자국에 거주하지 않는 국민에게도 소득세를 부과하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자국에 거주하지 않는 국민에게도 수입에 대한 세금을 매기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미국과 아프리카 에리트레아 두 나라뿐이라고 가디언은 설명했다.
미국은 2010년 제정한 해외금융계좌신고법(FATCA)에 따라 미국에서 영업 중인 외국 금융 회사에 미국 국적자에 대한 납세 정보를 IRS에 넘기라고 요구하고 있다.
은행을 포함한 영국 금융 기관들은 미국 정부가 정한 유예 기간 만료 시한이 올해 말로 바짝 다가옴에 따라 고객 중에 미국과 영국 이중 국적자를 확인해, 이들에게 미국 납세번호 등을 제출할 것을 최근 들어 부쩍 독촉하고 있다고 한다.
케임브리지에 거주하는 여성 연금 생활자는 "해외에 미국 돈을 은닉하는 큰 고기나, 상어를 잡기 위해 설치한 대형 그물 역할을 해야 할 FACTA가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나 같은 작은 피라미만을 잡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유럽은행연합회(EBF)는 미국에서 태어났다가 어린 시절 유럽으로 건너온 사람 수가 유럽연합(EU) 역내에 약 30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프랑스의 경우 이런 사람들이 4만명에 이르는 것에 비췄을 때, 영국에서도 비슷한 수가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영국 시민 토마스 카펜터(50) 씨는 작년에 온라인 주식중개업체인 인터랙티브 인베스터가 미국 세무 당국의 요청으로 10만 파운드가 들어있는 자신의 계좌를 동결하자 서한을 보내 존슨 총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뉴욕에서 태어나 5살 때 영국으로 이주한 존슨 총리는 2014년 런던 북부의 이즐링턴의 자택을 매도했는데, 미국 과세 당국이 이에 대해 세금을 매기려 하자 이에 반발하며 미국 국적을 포기했다.
정치권에서도 이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이달 초 노동당 소속 하원의원 프리트 카워 길 의원이 존슨 총리에게 자신의 선거구 주민을 대변하는 서한을 보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촉구했다.
어린 시절에 미국을 떠나 미국과는 관계가 단절되다시피 한 영국인들이 미국 국적을 가졌다는 이유로 매년 수백 파운드의 세금을 추가로 내거나 미국 국적을 포기하기 위해 2천 달러가 넘는 금액을 부담하도록 내몰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길 의원은 지적했다.
ykhyun1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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