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빠지자 터키·알아사드 정권 시리아 북동부로 진격
터키 대 시리아…국가 간 전쟁으로 확전 양상
러시아·이란 확전 경계하면서도 최대 영향력 키울 듯
(이스탄불=연합뉴스) 김승욱 특파원 = 미국이 '더는 세계 경찰 역할을 하지 않겠다'며 시리아 북동부 주둔군의 철수를 결정했다.
터키와 시리아 쿠르드족,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의 세력권이 겹치는 절묘한 위치에서 힘의 균형자 역할을 하던 미군이 갑자기 발을 빼면서 순식간에 격렬한 힘의 충돌이 빚어졌다.
끝내 트럼프에 버림받은 쿠르드족…미군, 시리아서 철수 준비 / 연합뉴스 (Yonhapnews)
여기에 직·간접적으로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온 러시아와 이란까지 미군의 공백이 부른 혼란에 얽히면서 중동 정세가 요동치는 모습이다.
시리아 북동부의 미군은 터키는 물론 남부의 알아사드 정권에게서도 쿠르드족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왔다.
쿠르드족은 수니파 극단주의 테러 단체 '이슬람국가'(IS)를 격퇴하는 데 앞장서 미국의 동맹 세력으로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터키는 쿠르드 민병대(YPG)를 자국의 쿠르드 분리주의 테러 단체인 '쿠르드노동자당'(PKK)의 분파로 보고 최대 안보위협 세력으로 여겨왔다.
8년에 걸친 내전 끝에 승기를 잡은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에게도 쿠르드족은 국토의 3분의 1가량을 무단 점령한 반역 세력에 불과했다.
북서부 이들립 주(州) 일대에 고립된 반군을 척결하는 즉시 창끝을 돌려야 할 상대지만 미군의 존재가 알아사드 정권의 발목을 잡았다.
화학무기 사용과 민간인 학살, 알아사드 대통령의 철권통치 등으로 미국에 단단히 찍힌 시리아 정부가 쿠르드족을 공격하다 자칫 미군의 개입을 부를 경우 정권의 존립 자체가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터키와 시리아 정부군의 위협에서 쿠르드족을 보호해온 미국이 지난 6일 '돈이 너무 많이 든다'며 갑자기 발을 빼버렸다.
터키와 알아사드 정권은 두 손을 들고 환영했다.
터키는 미국이 불개입을 선언한 지 불과 사흘 만에 시리아 국경을 넘어 쿠르드족을 공격했다.
중화기와 제공권을 앞세운 터키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견디다 못한 쿠르드족은 '어제의 적'인 알아사드 정권에 손을 내밀었고, 알아사드 정권 역시 '미국이 내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알아사드 정권은 단숨에 터키 국경에서 불과 20㎞ 떨어진 곳까지 병력을 전진 배치했다. 시리아 정부군이 북동부에 돌아온 것은 2012년 여름 수도 방어를 위해 철수한 이후 7년 만이다.
로이터 통신은 14일(현지시간) "시리아 정부군의 전진 배치는 시리아 전역에서 정부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과 그를 지원하는 러시아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전선은 이제 터키 대 쿠르드족이 아닌 터키 대 시리아의 국가 간 대치로 변모하는 모양새다.
다만, 전황이 터키와 시리아의 정면 대결로 치달을지는 미지수다.
터키 국방부는 이날 트위터를 통해 "국경에서 30∼35㎞까지 진격했다"고 밝혔다.
'국경에서 30㎞'는 터키군이 진격 목표로 설정한 거리다.
메블뤼트 차우쇼을루 터키 외무장관은 개전 이틀째인 지난 10일 "국경에서 시리아 쪽으로 30㎞까지 진격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터키가 시리아 국경을 따라 설치하려는 '안전지대'의 폭과 일치하는 거리다. 터키는 480㎞에 달하는 시리아 국경을 따라 폭 30㎞의 안전지대를 설치하고 자국 내 시리아 난민 100만 명을 이주시킬 계획이다.
터키가 당초 목표대로 여기서 멈춘다면 전선이 크게 확대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알아사드 정권의 반격 의지다.
알아사드 정권은 내전 기간 반군을 지원해온 터키에 오래전부터 적개심을 표출해왔다.
터키가 시리아 북동부로 진격하자 시리아 관영 사나(SANA) 통신은 지난 10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을 지칭해 "시리아 국민의 피로 흠뻑 젖은 경솔한 살인자"라고 맹비난했다.
알아사드 정권이 터키군의 진격을 쿠르드족에 대한 공격이 아닌 자국 영토에 대한 침공으로 볼 경우 영토 수복을 위해 적극적인 반격에 나설 수 있다.
다만, 이 경우에도 시리아 정부군이 터키군의 화력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중 미국을 제외하고 가장 큰 규모의 군사력을 보유한 터키와 비교하면 시리아 정부군 역시 양과 질에서 크게 뒤진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8년에 걸친 내전으로 병력 소모가 극심한 시리아 정부군은 지상군은 이란에, 공군은 러시아에 크게 의존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러시아와 이란의 입김에 전황이 크게 좌우될 공산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단 러시아와 이란은 터키의 진격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며 확전을 경계하는 자세를 보인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이날 '러시아가 터키와 군사적 갈등 상황에 빠져들 위험이 없는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고 답했다.
이어 "터키의 군사작전 초기부터 러시아는 시리아 사태의 정치적 해결을 방해하고 이 지역에 긴장을 초래할 수 있는 어떤 행동도 절대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면서 "이러한 입장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우리의 형제와 같은 우방 터키는 시리아에 대한 군사작전을 재고하길 바란다"라며 "터키 남부와 시리아 북부의 안보를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시리아 정부군이 그곳에 주둔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미군 철수로 생긴 힘의 공백을 러시아와 이란이 메울 가능성이 크다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CNN은 개전 직후 "미군이 철수하면 러시아와 알아사드 정권은 쿠르드족과 정치적 거래를 하거나 우월한 화력을 앞세워 진압하는 것 사이에서 손쉬운 선택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으며, 이는 불과 며칠 만에 현실이 됐다.
이란은 알아사드 정권이 시리아 북동부를 장악할 경우 이라크와 시리아를 거쳐 레바논의 친(親)이란 세력을 연결하는 통로를 구축할 수 있다.
CNN은 "이는 미국의 핵심 우방인 이스라엘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스라엘이 미군의 시리아 철수와 터키의 쿠르드 공격을 예의주시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세계 최대의 나라 없는 민족' 쿠르드족은 다시 한번 독립국 건설의 꿈을 접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쿠르드 자치정부의 고위 관계자인 바드란 지아 쿠르드는 알아사드 정권과의 합의와 관련해 "군사 협력이 우선"이라며 "정치적인 측면은 후에 논의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 알아사드 정권의 우산 아래로 들어간 이상 쿠르드족의 비원(悲願)은 사실상 물거품이 된 셈이다.
kind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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