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통신 "'경기 상승 이은 하락'은 국가 지도자에게 위험한 양식"
경기 호황기에 소외된 계층이 시위 주도
(서울=연합뉴스) 권혜진 기자 = 중남미 곳곳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반정부 시위의 배경에는 원자재 주도 경제 구조로 인한 경기 급등락이 자리한다고 AP통신이 23일(현지시간) 분석했다.
통신은 남미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인 칠레와 가장 가난한 국가인 아이티, 중도 성향 정부가 들어선 에콰도르와 사회주의 노선의 볼리비아에서 최근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 같은 해석을 내놨다.
정치, 경제, 역사, 문화가 다른 이들 국가의 공통분모가 있다면 지난 2000~2010년 원자재 가격 인상 등에 힘입어 경제가 급성장했다가, 이후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성장이 둔화했다는 점이다.
'경기 상승에 뒤이어 하락'하는 패턴은 민첩하지 못한 국가 지도자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양식이라는 것이 통신의 설명이다.
경제가 성장하면 중산층도 확산하는데 이는 곧 자신들이 더 많은 것을 정부로부터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또 이를 요구할 힘을 가진 계층이 늘어난다는 의미다.
반대로 경제 부흥기에서 소외된 계층은 자신들은 제자리걸음이거나 더 뒤로 밀려났는데 이웃은 잘나가는 광경을 보며 불공정하다는 느낌을 더욱 크게 갖게 된다. 이런 양극화가 결국 사회 불안정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세계 최대 구리 생산국인 칠레는 2000년부터 2014년까지 호황기를 맞았다가 이후 성장률이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현재 칠레 국민의 평균 소득은 월 560~700달러 수준으로, 각종 고지서를 내기만도 벅찬 상황이다.
이 와중에 정부가 지난주 지하철 요금을 인상하자 국가가 번영하는 동안에도 고전을 면치 못하던 국민 수천 명이 '수모'를 느끼고 거리에 나섰다는 것이다.
칠레의 여론조사 그룹인 라티노바로메트로의 마르타 라고스 소장은 칠레의 성장률 뒤에 엘리트 계층에 부가 집중된 현실이 가려졌다고 지적했다.
원유 부국인 에콰도르도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서면서 한때 경기 호황을 누렸다. 라파엘 코레아 전 대통령 정부가 고속도로와 공항, 대학을 건설한 것도 경제 부흥에 일조했다. 그러나 유가가 내려가면서 에콰도르는 수십억달러의 채무가 발생하고, 정부는 예산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결국 후임인 레닌 모레노 대통령은 유류보조금 삭감 등을 골자로 한 긴축 재정안을 발표했다. 이 때문에 휘발유와 경유 가격이 급등하자 성난 에콰도르 국민들이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를 주도하는 가장 큰 세력은 경제 부흥기에도 거의 혜택을 못 누린 영세 농민들이라는 점도 양극화가 반정부 시위의 원인임을 짐작게 한다.
볼리비아도 마찬가지다.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이 집권한 14년 동안 원자재 시장 호황에 힘입어 국내총생산(GDP)이 연평균 4%씩 성장했지만, 천연가스 가격 하락으로 국가 수입이 줄어든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경제가 더욱 취약해지고 있다며 경고했고, 경제 운용과 사회 기반시설 투자로 인기를 누렸던 모랄레스 대통령의 입지도 좁아졌다.
이런 가운데 지난 20일 대선에서 납득할 수 없는 개표 결과가 나오자 시위대는 격렬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아이티의 경우 다른 나라들과 달리 21세기 초반에도 경제가 매우 어려웠으나 2009년 베네수엘라 원유 지원에 이어 2010년 대지진 이후 국제 원조가 밀려들어오면서 사정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가 하락으로 베네수엘라의 경제가 붕괴되고, 원유 공급이 끊기면서 안 그래도 빈국인 아이티의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게다가 전·현직 관리들이 베네수엘라가 지원한 개발기금을 유용한 사실이 드러나자 성난 시민들은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고 통신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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