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는 韓日법정투쟁 결과…배상책임 외면·양국관계 악화
아베 내각 '개인 청구권 소멸 안했다' 국회 답변까지 부정
지소미아 종료 앞두고 정상 간 대화 이뤄질지 주목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한국인 징용 피해자에게 배상을 명령한 한국 대법원판결 1주년을 앞둔 가운데 일본 기업과 정부는 판결이 협정 위반이라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패소한 일본 기업 혹은 일본 정부가 한국 측의 협의 요청에 응하지 않고 계속 버티면 대법원판결을 근거로 한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 매각 절차가 진행될 전망이다.
이 경우 일본 정부의 한국 비난 수위는 더 높아지고 한일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
대법원판결에 의해 피해자들은 일본 기업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을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은 상태이며 사태 악화를 막으려면 일본 측의 태도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다.
◇ "징용피해자 불법 행위로 고통"…한국에서만 13년 넘게 법정 투쟁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확정되기까지 한국인 징용 피해자들은 오랜 기간 법정 투쟁을 벌였다.
징용 피해자들은 작년 10월 30일 신일철주금(新日鐵住金)에 대한 배상 판결이 확정되기까지 한국에서만 13년 넘게 소송을 이어갔다.
징용 피해자 다수가 초기에는 일본에서 소송을 벌였던 점을 고려하면 20년 이 넘는 장기간의 싸움이 대법원판결이라는 결실로 이어진 셈이다.
한국에서의 소송은 서울중앙지법→서울고법→대법원(파기환송)→서울고법→대법원을 거치며 진행됐고 작년 10월 30일 종료했다.
2005년 2월 28일 서울중앙지법에 소장을 제출하고 기약 없는 소송을 반복하는 동안 원고 중 한 명인 여운택(1923년생) 씨는 2013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대법원은 옛 일본제철이 징용피해자들에게 한 행위가 "당시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해당하고, 이러한 불법행위로 인하여 원고(징용피해자)들이 정신적 고통을 입었음은 경험칙상 명백하다"고 판시했다.
또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인해 징용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을 함께 밝혔다.
옛 일본제철(日本製鐵)을 계승한 신일철주금은 작년 판결 직후 "이번 판결은 한일 양국 및 국민 간의 청구권 문제는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1965년 한일청구권·경제협력협정, 그리고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견해와도 반한다"며 "매우 유감"이라고 밝혔고 배상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이 기업은 올해 4월 1일 일본제철로 다시 이름을 바꿨다.
징용 피해자들은 판결에 근거해 이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을 압류했고 현금화(매각) 절차를 진행 중이다.
징용 피해자들은 강제 매각이 아닌 포괄적인 협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있다는 뜻을 패소한 일본 기업들에 밝혔으나, 기업들은 면담을 거부하거나 성의 있는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일본제철 외에 미쓰비시(三菱)중공업도 한국인 징용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이 확정돼 한국 내 자산이 압류돼 있다.
◇ 한국 정부 1+1 해결책 제안했지만, 일본 정부 거부하고 '보복' 조치
한국 정부는 한국과 일본 양국 기업의 자발적 출연금으로 재원을 조성해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는 이른바 '1+1' 방안을 올해 6월 일본에 제안했다.
올해 6월 19일 한국 외교부가 이런 제안을 한 사실을 공개한 당일, 일본 외무성은 "한국의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는 것이 될 수 없어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며 즉각 거부 의사를 표명했다.
징용 소송이 사인(私人) 간 분쟁의 형식으로 진행됐지만, 역사 문제의 특수성과 이번 사안이 한일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한국 정부가 일본 기업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했음에도 일본 정부가 단칼에 거절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후에도 대화하겠다는 의지를 반복해 표명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의 제안이 "한국의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는 것이 될 수 없어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의 주장은 '한일 청구권 협정에 징용 피해자의 개인 청구권을 소멸시키는 한일 양국 정부의 합의가 포함됐다'는 인식을 토대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시에 배치되는 주장이다.
대법원판결과 이에 근거한 일본 기업 자산 매각 추진 등이 국제법 위반이라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의 주장은 과거 일본 정부가 일관되게 밝힌 입장과도 배치된다.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한 대표적인 사례는 1991년 8월 27일 야나이 슌지(柳井俊二) 당시 일본 외무성 조약국장이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내놓은 답변이다.
당시 그는 한일 양국과 양국 국민 사이의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고 한일청구권 협정이 규정한 것에 대해 "일한 양국에 있어서 존재하던 각각 국민의 청구권을 포함해 해결했다는 것이지만 이것은 일한 양국이 국가로서 가지고 있는 외교보호권을 상호 포기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야나이 당시 국장은 "따라서 이른바 개인의 청구권 그 자체를 국내법적인 의미로 소멸시켰다는 것은 아니다. 일한 양국 사이에서 정부로서 이것을 외교 보호권의 행사로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다"라고 부연했다.
일본 정부는 올해 7월 1일 반도체 소재 등 3개 품목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강화하는 등 사실상의 보복 조치를 발표했다.
8월 2일에는 한국을 백색국가(수출절차 우대국,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하는 등 대응 수위를 높였다.
이에 한국에서 일본 제품 불매 및 일본 여행 거부 운동이 확산하는 등 민간 교류에도 영향이 확산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해 양국 간 안보 협력 환경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으며 이런 상황에서 안보상 민감한 군사정보 교류를 목적으로 체결한 협정을 지속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종료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정부가 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책임을 외면하는 가운데 양국 관계는 경제·안보·민간 교류 분야 등에서 계속 악화하고 있다.
◇ 어렵게 이뤄진 한일 총리 회담…아베 "한국, 국제법 일방적으로 어겨"
이런 가운데 나루히토(德仁) 일왕의 즉위 선언 의식을 계기로 이달 24일 이낙연 국무총리와 아베 총리의 회담이 열렸다.
한일 관계가 악화한 가운데 고위급 대화가 열린다는 점에서 개최 전부터 관심을 끌었지만 징용 판결이 한일 청구권 협정 위반이라는 일본의 주장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카다 나오키(岡田直樹) 일본 관방부(副)장관이 일본 언론에 설명한 내용에 의하면 아베 총리는 '한국의 대법원판결은 국제법을 명확하게 위반했으며 일한 관계의 법적 기반을 근본부터 무너뜨리는 것이다. 한국은 국교 정상화의 기초가 된 국제조약을 일방적으로 어기고 있다'는 취지로 회담에서 이 총리에게 말했다.
이 총리는 '한국은 1965년 한일기본관계조약과 청구권협정을 존중하고 준수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하고 양국이 지혜를 모아 난관을 극복한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회담 말미에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받은 후 판결이 국제법 위반이며 한일 관계의 토대를 훼손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반복했다.
일본 측에서는 이번 회담이 평행선을 달렸다는 평가가 나왔다.
다만 한가지 주목할 점은 아베 총리가 이날 회담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 당국 간의 의사소통을 계속한다'는 뜻을 밝혔다는 점이다.
대법원판결이 청구권 협정 위반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일본 기업 자산 매각 등 한일 관계를 더 악화시키는 상황이 전개되지 않도록 대화를 통해 해법을 찾겠다는 의사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일본 내에서 한미일 대북 공조 약화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일본 정부가 지소미아 종료를 막기 위해 한국과의 대화에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이달 말부터 열리는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관련 정상회의와 내달 중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를 계기로 두 정상 간 직접 대화가 이뤄질지 주목된다.
모테기 외무상은 25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일 정상회담에 관해 "한국 측이 정상회담을 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수 있는지 어떤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고 여지를 남겼다.
일각에서는 아베 총리가 일왕의 즉위 선언이라는 국내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벤트를 계기로 접대용 발언을 한 것이며 낙관하기는 어렵다는 분석도 있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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