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이라크 국민, 이란 개입에 염증"…이란 "美 정보기관 공작"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지난달 1일부터 시작돼 300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이라크 반정부 시위의 성격을 놓고 미국과 이란의 여론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몰락한 뒤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이번 시위가 이란의 내정 개입을 더는 참지 못한 이라크 국민이 자발적으로 반이란 감정을 폭발한 것으로 해석한다.
반면 이란은 이란에 우호적인 이라크 현 정부를 흔들려는 미국과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공작이라고 규정하고 미국의 여론전에 맞서고 있다.
미국 AP통신은 익명의 이라크 소식통을 인용해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 이튿날(10월2일) 이란 군부 실세인 거셈 솔레이마니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이 야간에 바그다드에 날아와 이라크 관리들과 대책 회의를 했다고 지난달 30일 보도했다.
AP통신은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이라크 총리를 대신하는 것을 보고 이라크 안보 담당자들이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이 매체는 이번 반정부 시위가 이란의 영향력이 큰 시아파 지역인 이라크 남부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시위대가 이란의 내정 간섭을 규탄하자 이란이 이를 심각히 여겨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바그다드까지 왔다고 주장했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두 이라크 관리는 AP통신에 "이란에서도 (2017년 말)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는데 통제했다. 우리는 이런 시위를 어떻게 다루는지 안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AP통신은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다녀간 다음 날부터 이라크 군경이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했고, 사상자가 대규모로 났다며 연관성을 부각했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이라크의 행정수반은 총리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그러나 미국 주류 매체가 이란이 역내 내정 개입을 통해 테러리즘을 확산한다는 적대적 시각을 유지하는 점을 고려하면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한 이런 보도의 진위는 의심해 볼 만하다.
AP통신은 이어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1일 시위를 보도하면서 시위대가 '이란은 이라크에서 손을 떼라, 우리는 당신들을 원하지 않는다'는 식의 반이란 구호를 외쳤다는 점을 부각했다.
또 이라크 시아파 성직자 아흐메드 알사피가 이날 금요 대예배에서 "정부는 이라크 국민을 대할 때 외부의 어느 개인, 조직, 기구라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론했다고 전하면서 "명백히 이란을 염두에 둔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미국 블룸버그 통신도 2일 이라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알시스타니가 이번 시위를 두고 "어떤 사람이나 조직, 특정한 관점을 가진 세력, 중동이나 국제적 행위자가 이라크 국민의 뜻을 봉쇄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알시스타니의 말은 아랍어를 영어로 해석한 뒤 문어체를 구어체로 또 한 번 해석해야 진의를 이해할 수 있다"라며 "그의 말은 '하메네이(이란 최고지도자)는 물러가라'라는 뜻이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이라크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치고 현 정부와 원만한 관계인 이란은 방어하는 입장이다. 이란은 이슬람국가(IS) 격퇴전에서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를 직접 지원했고 이 민병대가 주축이 된 정파가 지난해 총선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이라크 현 연립정부의 한 축이 이 친이란 정파다.
유혈사태에도 이라크의 시위가 잠잠해지지 않자 이란도 상황을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지난달 30일 "이라크와 레바논의 정책 당국자는 미국과 서방, 시온주의자(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이 조성한 혼란과 불안을 치유하기 바란다"라고 연설했다.
이라크에서 벌어진 반정부 시위의 배후로 미국의 정보기관을 지목한 것이다.
그는 또 이들 나라의 반정부 시위에 중동의 반동적 국가(사우디아라비아, UAE)가 자금을 댔다고 말했다.
이어 "국민은 정당한 요구를 하지만 그 요구는 그 나라의 법체계 안에서 해결돼야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라며 시위대에게 자제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적들은 이란에 대해서도 똑같은 공작을 꾸몄지만 이란 국민이 이를 간파해 무용지물이 됐다"라고 강조했다.
테헤란의 금요 대예배 집전자인 최고 성직자 아야톨라 모하마드 알리 모바흐헤디 케르마니도 1일 "이라크 국민은 내분과 갈등을 조장하는 적들(미국, 이스라엘)의 공작을 경계해야 한다. 믿을만한 정보에 따르면 주이라크 미 대사관이 이라크의 폭력시위를 노골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라고 설교했다.
이란 국영방송은 블룸버그 통신이 인용한 알시스타니의 설교에 대해 "시민이 무고한 피를 더는 흘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라크 국민의 시위를 악용하는 외부 세력(미국, 이스라엘)의 개입을 경고했다"라고 보도했다.
'외부 세력'의 정의를 두고 미국 매체와 다른 관점으로 해석한 셈이다.
또 알시스타니가 시위 과정에서 발생한 유혈사태에 유감을 표시했다면서 내전과 파괴, 혼란으로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고 우려했다는 데 무게를 실었다.
시위 현장을 전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시된 동영상과 사진을 보면 이란을 반대하는 구호와 현수막도 보이지만, 이란을 중심으로 한 시아파가 숭모하는 이맘 후세인의 표식을 앞세운 시위대도 눈에 띈다.
이런 점을 종합해보면 이라크의 시위는 실업난, 공공 서비스 부족을 해결하지 못하는 정부를 규탄하는 흐름은 대체로 일치하지만, 장기화할 경우 이란과 관계를 놓고 정치적인 충돌로 비화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hsk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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