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실리콘밸리서 석학 초청해 '글로벌 리서치 포럼'
(샌프란시스코=연합뉴스) 정성호 특파원 = "한마디로 하면 티세포(t-cell) 면역학계의 '핵인싸'(핵심적 내부 인사)가 되는 것 같다. 이너서클이 되는 거다."
8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의 삼성전자 미주법인에서 만난 신의철 한국과학기술원(KIAST) 교수는 전날부터 이날까지 이틀간 이곳에서 열린 '삼성 글로벌 리서치 심포지엄'에 참가한 소감을 이같이 밝혔다.
글로벌 리서치 포럼은 기초과학 분야 연구활동을 지원하는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이 세계적 석학을 초빙해 개최하는 학술대회다.
2015년 시작해 이번에 7회째를 맞았는데 특히 지난해부터는 기존의 전형적인 대형 학술대회 형식을 벗고 분야별 일급 석학 20명 안팎을 초청해 비공개 행사로 열고 있다.
1천 명 가까이 참석하는 대규모 학술대회 대신 소규모의 비공개 학술행사를 통해 연구자 간 네트워킹과 친교를 강화하고 밀도 높은 학술 교류가 이뤄지도록 하자는 의도에서 형식을 바꾼 것이다.
'고든 리서치 콘퍼런스'의 포맷도 일부 차용했다. 고든 콘퍼런스는 기초과학계의 가장 유명한 석학들을 초청해 개최하는 학술대회다. 일반 학술대회와 달리 아직 논문으로 발표되지 않은 연구 결과를 가져와 토론하기도 한다. 이 행사는 60∼120명 규모로 열린다.
신 교수는 "한국의 과학 커뮤니티가 '갈라파고스' 같은 면이 있다. 지리적으로도 그렇고 언어적 장벽도 있다"며 "그 때문에 한국의 과학이 덜 알려지고 저평가되는 것을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이 극복해보려고 기회를 마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재단으로부터 연구비 지원을 받는 신 교수 등 연구자 3명이 행사 주제를 정하고 초청장을 보내는 등 행사를 조직했다.
지난해에는 '신경생물학'을 주제로 콘퍼런스가 열렸고, 올해는 '티세포 면역학'을 주제로 잡았다. 해외 석학 12명에 해외 과학 저널 에디터 3명, 국내 석학·연구자 등 9명 등 24명이 참석했다.
티세포는 인체 면역을 담당하는 백혈구의 일종이다. '면역의 사령관' 역할을 맡고 있어서 백신을 맞게 되면 티세포가 항체를 만들라고 지시한다.
티세포가 최근 주목받는 것은 암 치료 분야에서 새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연석 서울대 교수는 "암이라는 게 암세포도 있고 건강 세포도 있는데 골라서 암세포만 죽이는 시스템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며 "수술이든, 방사선 요법이든, 화학 요법이든 모두 다른 세포도 죽이는데 면역학을 이용하면 병든 세포만 죽일 수 있는 기전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메커니즘이 이론에 머물다 최근 기술적 진보가 이뤄지면서 티세포를 활용해 암을 치료하려는 노력이 일고 있고, 상당한 성과도 거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제약회사들도 관심이 크다. 또 지난해 노벨생리의학상을 탄 미국 제임스 앨리슨과 일본 혼조 다스쿠 교수는 티세포를 이용한 면역항암제의 원리를 발견한 공로로 수상했다.
정 교수는 "대부분 학회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공개해서 하는데 오늘 온 12명은 티세포 분야의 전 세계 톱클래스 석학들"이라며 "이분들과 우리가 한 방에 있다는 게 평생 가능한 일일까 했는데 이런 기회를 갖게 돼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윤태 포스텍 교수도 "고속도로를 한 번 탄 것 같은 느낌"이라며 "이렇게 많은 사람을 알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한 번에 모두 알게 됐다"고 말했다.
교수들은 이런 소규모 학술모임의 장점으로 사적 친분의 구축과 연구 결과를 두고 활발한 의견 교환이 가능한 점, 아직 저널·논문 등에 공개되지 않은 '따뜻한' 연구 결과의 공유 등을 꼽았다.
일례로 '티세포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크 데이비스 스탠퍼드 의대 교수는 면역 반응을 살펴볼 때도 미니 장기를 이용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이번에 발표했다.
미니 장기는 심장이나 간, 근육 등의 세포를 시험관 내에서 키운, 세포보다 크고, 장기보다는 한 단계 아래인 장기인데 면역학에서는 이런 미니 장기를 이용한 실험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왔으나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이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연구 결과다.
또 비제이 쿠치루 하버드 의대 교수는 면역세포가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자가면역 질환에서 가장 핵심 역할을 하는 'Th17'이란 티세포를 2006년 처음으로 발견한 학자인데, 이번 콘퍼런스에서 세포의 대사를 분석하는 컴퓨터 알고리즘을 새로 만들었다고 밝혔다.
신 교수는 "이 발표가 끝나자마자 제 연구실에서 데려온 학생이 쿠치루 교수에게 이 알고리즘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며 "미팅의 성과"라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한국과 다른 외국의 연구 환경으로 창의성과 독창성을 중시하는 문화를 지목했다.
신 교수는 "한국에서 석학을 모셔서 강의를 들었다면 '우리도 빨리 흉내 내서 하면 괜찮은 저널에 논문을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며 "이 사람들은 이걸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이걸 어떻게 나만의 스토리로 만들까를 고민한다"고 말했다.
김성근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은 "우리 사회가 단기간에 압축성장을 했기 때문에 성공 모델을 빨리 카피해서 내가 거기 들어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학문의 세계는 그와 다르다. 인간 정신 작용이 극대화된 분야로 갈수록 (남과) 달라지려고 하는 노력이 굉장히 강조된다"며 "그래야 노벨상 수상자도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이사장은 "잘한다고 주는 게 노벨상이 아니다. 육상 경기라면 기존 기록보다 잘 뛰면 금메달을 받는다"며 "노벨상은 그게 아니라 새로운 종목을 만들어야 한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하고 새로운 걸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학자로 살면서 '대박'을 쳐보고 싶다는 꿈을 펼치게 해주기 위해 재단이 이런 학술 사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공개하지 않은 연구 결과나 개발한 툴도 공개하고 언제든지 같이 연구하자는 제안도 받았다"며 "다른 연구자에게도 이런 기회가 더 확장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sisyph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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