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은 사라졌지만 유럽엔 새로운 분단이….

입력 2019-11-11 16:44  

베를린 장벽은 사라졌지만 유럽엔 새로운 분단이….

(서울=연합뉴스) 유영준 기자 = 베를린 장벽과 철의 장막이 붕괴하면서 유럽에 냉전이 종식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동서 유럽에 새로운 정치적 분단이 일어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독일 통일의 경제적 성공과 동유럽 전반에 걸친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동서 유럽 두 지역이 다시금 자유주의와 포퓰리즘 등 가치관의 충돌로 분열하고 있으며 이는 서방 동맹과 유럽연합(EU) 단합을 저해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0일 조망했다.
서유럽의 경우 갈수록 기성 체제에 도전하는 정치인들의 '반란'에 직면하고 있지만 자유주의적 가치와 법치, 그리고 인권과 시간적으로 검증된 제도들을 고수하고 있는데 비해 동유럽의 경우 많은 지역에서 권위주의적 통치를 선호하고 이민과 종교적 다양성, 동성애, 페미니즘 등을 거부하는 토착 정당들이 상승세를 보인다.
한때 소련의 압제에 항거했던 폴란드와 체코, 헝가리 등과 같은 동 유럽국들은 현재 서방의 자유주의적 가치를 강력히 거부하는 정부들이 통치하는 아이러니를 빚고 있다.



동독 치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벌였던 일부 인사들이 이제는 반이민 '독일을 위한 대안'(AfD)과 같은 극좌, 혹은 극우 정당들에 동조에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관대한 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는 현상도 빚어지고 있다.
이민 등 문제에서 민주주의의 의미를 둘러싼 계층 간 견해차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물론 유럽의 가치관 분열이 지역별로 확연한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오스트리아의 일부 정당들은 이민과 이슬람을 거부하고 있으나 슬로바키아와 같은 동유럽국들은 자유주의적 정부를 선택하고 있다.
또 헝가리와 폴란드 일부 도시에서는 최근 선거를 통해 자유주의적 성향의 시장들이 들어서고 있다.
철의 장막이 사라졌음에도 유럽이 다시금 분열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불가리아 출신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 중인 학자 이반 크라스테프는 최근 자신의 저서 '스러진 빛'(The Light That Failed)에서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와 같은 '반체제' 토착 정치인들이 중산층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얻고 있는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크라스테프는 철의 장막이 사라지면서 공산당 관료들에 의한 통치가 고통스러운 경제 개혁을 주도하는 EU와 다른 국제기구들이 지원하는 관료들로 대체됐을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1989년 장벽 붕괴 이후 동유럽 지역에서 수백만 명이 서방으로 이주하면서 엘리트 계층의 공동화 현상을 빚었으며 옛 동독 지역의 경우 통일 이후 400만명이 이주하면서 AfD가 그 공백을 이용해 세력을 키우고 있다.
특히 주민들의 대거 이주로 취약해진 지역 공동체에 대한 이민의 위험성이 결국은 전반적인 이민 반대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크라스테프의 분석이다.
세르비아 출신으로 뉴욕에서 활동하는 경제학자인 브란코 밀라노비치는 1989년 장벽 혁명을 광범위한 민주화 봉기보다 민족 해방 투쟁 성격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1989년 이후 EU 가입과 함께 급속한 경제성장이 뒤따랐지만 동유럽국들의 경우 인종적 다양성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크라스테프의 연구에 따르면 역설적이게도 냉전 시기 주민들의 자유여행이 금지됐던 동유럽 지역들의 경우 폴란드인의 50%와 헝가리인의 49%가 이민 정책 대안으로 자국민의 장기간 출타에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폴란드 집권당 대표인 야로슬라프 카친스키는 자국민의 해외 이주 선풍을 우려해 한때 미국 정부에 자국민에 대한 이민비자 완화 조치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폴란드와 헝가리의 경우 서방측으로부터 언론자유 제한과 사법부를 비롯한 국가기관 장악에 대해 거센 비난을 받고 있으나 국내 선거에서는 여유 있게 승리하고 있다.
인접 체코의 안드레이 바비스 총리 정부도 포퓰리즘 비난을 받고 있으나 주민들의 경제적 곤경과 좌절을 이용해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옛 동독 지역을 포함해 동유럽국들의 경우 강력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아직 서유럽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그렇다고 옛 소련 시절 국가에 의한 평생 복지 시스템도 사라진 지 오래다.
주민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기성 정당들의 무능이 포퓰리즘 대두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한편으로 서방의 경우 자유주의가 인종적 다양성과 동성애와 같은 좌파적 가치로 확대하는 등 그 정의가 변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독일과 유럽통합의 설계자인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는 이미 현재와 같은 장벽 붕괴의 역풍을 예견했다는 전언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그 이후에 대해 3권의 저서를 낸 언론인 다니엘 비스쿠프는 WSJ에 "그(콜 총리)는 역풍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면서 "서방 정부와 기업이 합심할 때에만 동독의 부흥이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그는 그렇지만 "우리는 시장의 힘에 그들의 일을 맡겨놓고 있다"고 덧붙였다.
yj3789@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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