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냄비처럼 내 배도 텅 비어"…분노·애환의 중남미 냄비 시위

입력 2019-11-28 06:29  

"빈 냄비처럼 내 배도 텅 비어"…분노·애환의 중남미 냄비 시위
특유의 냄비 시위 '카세롤라소', 콜롬비아·칠레 등서 펼쳐져
생활고·무능 정부에 항의…중남미 현대사에서도 주요 역할



(멕시코시티=연합뉴스) 고미혜 특파원 = 반(反)정부 시위가 일주일째 이어지고 있는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 거리엔 27일(현지시간)에도 '쨍그랑'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손에 냄비를, 다른 한 손엔 막대를 쥔 시위대는 타악기처럼 박자를 맞춰 냄비를 두드리며 거리를 행진했다.
중남미 각국의 시위에서 자주 등장하는 냄비 시위, '카세롤라소'(cacerolazo)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날 냄비 시위를 조명하면서 "중남미에서 '냄비 두드리기'는 권력자들에겐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라고 표현했다.
카세롤라소라는 말은 냄비를 뜻하는 스페인어 '카세롤라'(cacerola)에서 나왔지만 굳이 냄비가 아니어도 된다.
프라이팬이나 주전자, 쿠키 깡통까지 쨍쨍 소리를 낼 수 있는 금속 주방기구가 총동원된다. 두드리는 막대도 스푼이나 포크, 국자, 주걱 등 부엌에 있는 것들이다.
시위대가 주방기구를 두드리는 것은 먹고살기 힘든 처지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텅 빈 냄비나 프라이팬처럼 내 배도 텅 비었다는 뜻이다.

중남미 역사학자인 콜린 스나이더 미국 텍사스대 교수는 WSJ에 "시위대는 가장 기본적인 요리 도구를 통해 그들의 일상이 얼마나 힘든지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상징적인 의미도 크지만 따로 구입하지 않아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데다 꽤 큰 소리를 내기 때문에 효과도 크다. 거리에 나가지 못한 시위대는 창문을 열고, 또는 발코니에 나와 냄비를 두드리며 시위에 동참할 수도 있다.
지난 22일 보고타에 야간 통행금지령이 내려졌을 때도 시위대는 '침묵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발코니나 옥상에서 냄비 시위를 펼쳤다.
중남미 각국 현대사에서 냄비 시위는 비중 있게 등장해 왔다.
WSJ는 "에콰도르부터 아르헨티나까지 정부를 끌어내리는 데에도 냄비 시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스나이더 교수에 따르면 중남미에서 냄비 시위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64년 브라질 중산층 주부들이다.
주앙 굴라르 당시 대통령의 좌파 정책이 식량난으로 이어질까 두려워한 주부들이 냄비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는 것이다. 굴라르 전 대통령은 이후 군부 쿠데타로 축출됐다.
냄비 시위가 보다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1971년 칠레에서였다.
역시 좌파 정권이던 살바도르 아옌데 전 정권에 대한 항의의 뜻을 담아 여성을 중심으로 한 칠레 시위대가 '냄비 행진'을 벌였다.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퇴진을 요구할 때도 시위대는 냄비를 들고나왔다.
아르헨티나에서도 2001년 페르난도 델라 루아 전 대통령의 퇴진 시위에 냄비가 등장했고, 에콰도르에서 1997∼2005년 세 대통령이 연이어 축출될 때도 냄비 시위가 역할을 했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에 반대하는 시위가 잦았던 2000년대 베네수엘라에선 냄비 두드리기에 지친 시위대가 냄비 소리가 담긴 CD를 이용하기도 했다고 WSJ는 전했다.
올해 에콰도르, 칠레 등 중남미 각국에서 도미노처럼 번지고 있는 시위에도 냄비는 자주 등장한다.
가장 최근 시위 행렬에 동참한 콜롬비아에선 평화로운 냄비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WSJ에 따르면 최근 트위터에는 콜롬비아 주방기구업체 '이무사'를 이번 시위 공식 후원업체로 지정해야 한다거나, 냄비를 하도 두드렸더니 냄비 바닥에 오래 눌러 붙어있던 탄 밥이 드디어 떨어져 나갔다는 우스갯소리도 오가고 있다.

mihy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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