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압승 후 소강상태 보이다 정부 변화 없자 다시 '투쟁'
"행정장관 직선제 위해 싸울 것"…'하늘이 中공산당 멸할 것' 팻말도
"한국처럼 민주화 꼭 쟁취하겠다"…韓 시민사회 대표단에 뜨거운 환영
(홍콩=연합뉴스) 안승섭 특파원 = 8일 오후 홍콩 도심은 80만명에 달하는 검은 옷의 물결로 뒤덮였다.
'세계 인권의 날' 기념집회 개최지인 빅토리아 공원은 물론 홍콩 최대 번화가인 코즈웨이베이, 홍콩정부청사가 있는 애드머럴티, 경찰본부가 있는 완차이, 금융 중심가인 센트럴 등이 모두 홍콩 시민들로 가득 찼다.
주최 측은 빅토리아 공원에서 센트럴까지 행진을 계획했지만, 거리에 사람이 워낙 많은 탓에 1시간에 고작 수십미터를 갈 수 있을 뿐이었다. 홍콩 도심 전체가 집회장으로 변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빅토리아 공원 인근에서 만난 라이(66) 씨는 지난달 24일 구의원 선거에서 범민주 진영의 압승은 끝이 아닌 시작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범민주 진영이 압승을 거뒀지만, 홍콩 정부는 전혀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며 "우리는 계속해서 거리로 나올 것이며, 우리의 5대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홍콩시민 80만명 다시 거리로…검은 옷의 물결로 뒤덮여 / 연합뉴스 (Yonhapnews)
홍콩 시위대의 5대 요구 사항은 ▲ 송환법 공식 철회 ▲ 경찰의 강경 진압에 관한 독립적 조사 ▲ 시위대 '폭도' 규정 철회 ▲ 체포된 시위대의 조건 없는 석방 및 불기소 ▲ 행정장관 직선제 실시 등이다.
지난달 24일 홍콩 구의원 선거에서 범민주 진영은 전체 452석 중 400석 가까이 '싹쓸이'하는 압승을 거뒀다.
하지만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은 "송환법 철회는 이미 받아들였으며, 이를 제외한 다른 요구 사항에 대해서는 정부의 입장을 이미 분명하게 설명했다"며 시위대의 요구를 일축해 시민들의 큰 분노를 샀다.
구의원 선거 후 첫 대규모 집회인 이날 시위는 홍콩 시민들에게 여러모로 깊은 의미를 지닌다.
유엔이 정한 세계 인권의 날(10일)을 기념해 열렸지만, 지난 6월 9일 시작된 송환법 반대 시위가 만 6개월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동시에 시위 현장에서 추락했다가 지난달 8일 숨진 홍콩과기대생 차우츠록(周梓樂) 씨의 사망 한 달을 맞는 날이기도 하다.
시위 현장에서 만난 홍콩 시민들은 차우 씨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경찰에 대한 격한 분노를 드러냈다.
한 50대 여성이 든 팻말에는 '경찰의 나쁜 짓을 철저하게 조사해서 경찰폭력에 반드시 책임을 묻자'(撤査警黑 追究警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이 여성은 "지난 6개월 동안 경찰이 저지른 폭력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시민들에게 실탄을 쏘고 마구 구타하는 행동은 결코 용납받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경찰과의 충돌을 비롯한 폭력적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으며 평화적인 시위로 마무리 됐다.
이날 행진은 주최 측인 홍콩 재야단체 연합 민간인권전선이 지난 7월 21일 이후 4개월여 만에 경찰로부터 허가를 받은 시위이다.
이는 홍콩 경찰도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범민주 진영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선거 승리를 축하하듯 이날 시위에는 10, 20대 젊은 층은 물론 중년 부부와 노인 등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선거 압승에 고무된 덕분인지 이날 시위에 나선 홍콩 시민들은 '행정장관 직선제'라는 좀처럼 언급을 삼가하던 주제를 과감하게 꺼내들었다.
40대 여성 조안 씨는 "우리의 제1목표는 무엇보다 행정장관 직선제"라며 "'일국양제'를 통해 홍콩에 고도의 자치가 보장된 만큼 중국 중앙정부는 홍콩에 행정장관 직선제를 허용해야 할 것이며, 우리는 이를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는 1997년 홍콩 주권 반환 후 50년간 중국이 외교와 국방에 대한 주권을 갖되, 홍콩에는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한 것을 가리킨다.
홍콩이 중국 영토라고 하지만, 이날 홍콩 시민들은 중국 공산당에 대한 강한 분노와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미국에 대한 고마움을 드러냈다.
'하늘이 중국 공산당을 멸할 것이다(天滅中共)'라는 팻말을 든 시민 슈(30) 씨는 "시민들에게 폭력을 마구 휘두르는 홍콩 정부와 경찰의 배후에는 중국 공산당이 있다"며 "중국이야말로 홍콩의 민주주의를 짓밟는 존재"라고 비난했다.
그는 "중국은 본토인이 권력과 부를 누리도록 하고, 홍콩인은 차별받는 존재로 전락시켰다"며 "우리가 여기에 나온 것은 본토인은 누리지 못하지만, 홍콩인은 누리는 단 하나 바로 '자유'를 위해 싸우고자 나온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에 성조기를 들고 코즈웨이베이를 행진하던 존 무어(32) 씨는 "홍콩인권법안에 서명해 홍콩 시위대를 지지해준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나타내고 싶어 오늘 성조기를 들고 나왔다"고 말했다.
홍콩인권법은 홍콩의 자치 수준을 매년 검증해 홍콩이 누리는 특별 지위를 유지할지 결정하고, 홍콩의 인권 탄압과 연루된 중국 정부 관계자 등에 대한 비자 발급 등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날 집회에는 한국 시민단체 대표들도 참여해 홍콩 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참여연대, 민변, 다산인권센터, 한국YMCA전국연맹 등 '한국시민사회 연대 방문단'은 홍콩 시위에 대한 지지와 연대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이날 집회에 참여했다. 이들이 연단에 오르자 홍콩 시민들은 열렬한 환영의 박수를 보냈다.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황수영 팀장은 "오랜 기간 민주화 투쟁을 해온 한국과 지난 6개월 동안 시위를 이어온 홍콩의 경험을 서로 공유하고자 홍콩을 찾았다"며 "홍콩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진심 어린 지지와 연대를 보낸다"고 밝혔다.
이들은 'We stand with Hong Kong People(우리는 홍콩인들과 함께 한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이날 홍콩 시민들과 같이 행진했다.
이날 시위 현장에서는 '홍콩 경찰, 폭력은 이제 그만!!'이라고 한국어로 쓴 팻말을 들고 있는 홍콩인도 눈에 띄었으며, 시위대가 태극기를 들고서 행진하는 모습도 목격됐다.
행진 도중 만난 샘 렁 씨는 "'택시운전사', '1987' 등의 영화가 홍콩에서 큰 인기를 끌어 홍콩인들은 한국의 민주화 투쟁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며 "한국처럼 우리도 끝까지 투쟁해 반드시 민주주의를 쟁취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ss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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