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기·대책본부 등 초기대응 빨랐지만…크루즈선서 5명중 1명 감염
'추가감염 우려없다' 하선시켰더니 양성…"정권 눈치보기 대응 결과"
"美CDC 같은 기관 있었으면 달랐을 것…전문성·권한 겸비 조직 필요"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검역으로 '미즈기와'(水際) 대책 강화를 도모하겠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이 이슈로 부상하기 시작한 지난달 23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국회에서 이같이 대응 방침을 밝혔다.
미즈기와는 육지와 물이 만나는 곳(물가), 상륙하기 직전 등을 의미하는 일본어다.
전염병과 관련해 미즈기와 작전·미즈기와 대책이라고 표현하면 입국하는 관문인 공항이나 항만에서 검역 등을 통해 전염병의 역내 유입을 차단하는 것을 말한다.
아베 총리는 철저한 검역 등으로 감염 의심자들이 입국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셈이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는 아베 정권이 미즈기와를 고집한 것이 선내 감염자를 양산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 전세기 파견·범정부 대책본부, 초기대응 빨랐지만…허점도
일본 정부는 우한시를 중심으로 코로나19가 확산하자 지난달 29일 오전 우한 공항에서 자국민을 태운 첫 전세기를 출발시키는 등 미국과 더불어 가장 먼저 전세기를 투입했다.
초기 대응은 아베 정권이 그간 보여준 '위기에 강한 여당'의 모습이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당시 집권 세력이던 현재의 야당이 우왕좌왕하다 지탄받는 것을 똑똑히 지켜본 아베 정권은 태풍·지진·북한 미사일 발사 등 위기감이 고조하는 상황에서 신속하고 일사불란하게 대응하며 유권자의 신뢰 기반을 다져왔다.
일본 정부는 아베 총리는 본부장으로 하고 각료 전원을 구성원으로 하는 코로나19 대책본부를 지난달 30일 설치하는 등 범정부 대응에 나섰다.
또 이달 1일부터 2주 이내 중국 후베이(湖北)성에 체류한 적이 있는 외국인 등의 입국을 거부하기는 등 코로나19 유입 차단을 위한 조치에 나섰다.
한국 정부(2월 4일부터 입국 제한)보다 사흘 앞서 입국 제한을 단행한 것이다.
코로나19 초기 확산을 막는데 이런 조치는 일정하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서두른 나머지 일부 허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귀국하는 일본인을 격리 수용할 시설도 확정하지 못한 상태로 전세기를 파견한 것이다.
급하게 마련한 호텔의 객실이 부족해 일부 귀국자가 객실을 공유하도록 했고 이 가운데 무증상 감염자가 타인과 방을 함께 쓰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 코로나19 일본 유입 막으려다 탑승자 5분의 1 감염
일본 정부의 대응 중 가장 큰 논란을 낳은 것은 요코하마(橫浜)항에 정박한 대형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호 탑승자를 선내에 장기간 묶어둔 조치다.
탑승자 전원을 수용할 시설이나 이들을 검사할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해 미즈기와 대책의 연장선에서 대응한 셈이다.
이런 조치가 합당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찬반 양론이 있으나 결과적으로 다수의 감염자를 양산했다.
다이아몬드 프린세스가 이달 3일 요코하마항에 입항할 당시 승객 2천666명, 승무원 1천45명 등 모두 3천711명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24일 오전 기준으로 약 18.6%인 691명의 감염이 확인됐다.
이는 다이아몬드 프린세스에 머물다 전세기·전용기를 타고 귀국한 이들 중 확인된 감염자를 제외한 수치다.
일본 정부는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호 감염자가 상륙 전에 발생했다고 세계보건기구(WHO)에 문제를 제기해 일본 감염자와 별도로 집계하도록 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국내 유입 차단에 급급한 가운데 선내 감염 확산을 막는 조치는 미흡했다.
홍콩에서 먼저 내린 남성(80)이 코로나19 양성인 사실이 확인된 이달 1일 확인됐는데 탑승자의 선내 이동을 통제하지 않고 내버려 두다가 이달 5일에서야 객실에 머물도록 조치했다.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1일에는 오키나와(沖繩)현 나하(那覇)항에 기항했고 3일 이후에는 수도권 요코하마(橫浜)항에 머물렀다.
일본의 행정력이 미치는 범위에 있는 동안 감염이 크게 확산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뒤늦게 선내 검역 등에 나섰지만 감염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었다.
20일에는 다이아몬드 프린세스에 타고 있던 80대 승객 2명이 코로나19에 걸린 후 사망했다.
이 가운데 한명은 발열 증상이 나타난 후 1주일이나 객실에 방치돼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23일에는 탑승자였던 80대 남성이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일본 정부는 유족이 동의하지 않았다며 코로나19 감염 여부를 밝히지 않았다.
일본에서 확인된 코로나19 감염자 수는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탑승 감염자 691명을 포함해 24일 오후 7시 기준 845명이다.
◇ "객실격리 이후 안전"하다며 약 1천명 하선…뒤늦게 감염자 확인
선내 감염이 확산한 후 탑승자를 내리도록 했으나 이 과정에서 감염방지 조치가 충분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객실 격리 2주를 채운 후 19일부터 검사 결과 음성이며 증상이 없는 이들을 약 980명을 선별해 내리게 했다.
5일 객실 격리를 시작한 후에는 추가 감염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전제한 조치다.
하지만 이렇게 내린 한 60대 일본인 여성이 귀가 후 실시한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았고 비슷한 선별 과정을 거쳐 전세기를 타고 귀국한 호주인 가운데도 감염자가 확인됐다.
애초 일본 정부는 하선한 이들이 대중교통을 타고 귀가하도록 하고 추가 격리도 강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추가 감염 우려가 커지자 대중교통 이용을 자제해달라고 당부했다.
한국이나 미국 등 여러 국가가 선내 격리 후 귀국한 이들에 대해서도 추가로 2주 격리를 하는 등 객실 격리 이후 감염 가능성에 대비한 조처를 하고 있었는데도 일본만 독자적으로 행동하다 뒤늦게 방침을 바꾼 셈이다.
◇ "이 시국에"…각료들 대책회의 결석·지지율 급락
일본 정부 주요 인사의 태도에서도 긴장감 부족이 감지된다.
16일 총리관저에서 열린 코로나19 대책본부 회의를 각료 3명이 빼먹었다.
결석한 각료는 아베 총리의 복심으로 불린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문부과학상과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 환경상, 모리 마사코(森雅子) 법상(법무장관)이다.
고이즈미 환경상은 술을 곁들여 열린 후원회 신년회에 갔다가 거듭 사죄해야 했다.
하기우다 문부과학상은 소방단 관계자가 서훈을 받은 것을 축하하는 자리에, 모리 법상은 서예전에 갔다.
세 각료는 대책회의 대신 지역구 행사에 간 것이라서 국가 위기 대응보다 정치적 기반 관리를 중시하는 민낯을 드러낸 사건으로도 평가받는다.
대책본부를 이끄는 아베 총리도 회의 참석 시간이 평균 12분, 짧은 날은 3분에 그쳐 보여주기 회의라는 지적을 샀다.
아베 정권이 코로나19에 잘 대처했는지에 대한 평가는 일본 주요 언론이 유권자를 상대로 이달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 엿볼 수 있다.
요미우리신문이 조사에서는 코로나19 대응이 미흡하다는 의견이 52%를 기록했고 아사히신문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85%가 일본에서 코로나19가 확산할 것이라는 불안감을 표명했다.
교도통신, 요미우리신문, 민영방송 네트워크 ANN의 조사에서 아베 내각 지지율은 각각 8.3% 포인트, 5% 포인트, 5.6% 포인트 하락하는 등 아베 정권의 구심력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
◇ "현장 모르는 각료가 정권 눈치 보며 대응한 결과"
현재까지 상황으로 보면 일본은 코로나19 대응에 실패했으며 이는 검역 현장과 전문가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총리실 중심으로 밀어붙이는 아베 정권의 체질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가미 마사히로(上昌廣) '의료 거버넌스 연구소' 이사장은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승객 사망을 거론하면 일본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이 일단은 "실패"라고 규정했다.
그는 코로나19가 선내에서 확산하고 있었음에도 탑승자를 객실에 머물도록 강제한 것은 사태를 악화한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평가했다.
가미 이사장은 "(아베 정권은) 도쿄올림픽이나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방문을 앞두고 (코로나19가) 만연하도록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상륙 직전에 확산을 저지했다는 메시지를 발표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검역) 현장에 관해 아무것도 정통하지 않은 후생노동상이나 총리관저가 결정한 측면이 강해서 큰 혼란을 초래했다"며 "여러 사람이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말해도 결정하는 것은 아베 총리 주변 인사들이고 그들은 상륙 전 저지 작전이 성공했다고 말하고 싶어서 눈치 보기를 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예상을 넘는 전염병 확산 등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전문성과 권한을 겸비한 컨트롤 타워가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아사히(朝日)신문은 이번에 코로나19와 관련한 조사·분석 등을 주로 담당한 일본 국립감염증연구소가 후생노동성 산하 기관이며 독자적인 판단으로 기자회견을 여는 것조차 어려웠다는 점을 최근 사설에서 꼬집었다.
이 신문은 "일본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와 같은 조직이 있으면 대형 크루즈선 대응이나 (사태) 전개가 달랐을 것"이라며 "지금 필요한 것은 독립한 감염증 대책 전문가 조직을 만드는 것"이라고 제언했다.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탑승자가 대부분 하선한 가운데 일본 내 지역사회 감염 확산 추세가 향후 일본의 코로나19 대응에서 관건이 될 전망이다.
홋카이도(北海道)에서는 중학교 교사의 감염이 확인되고 10대 미만 어린이부터 80대 남성까지 각 연령대의 감염자가 속출하는 등 지역 감염 확산 추세도 심상치 않다.
일본 정부는 증상이 악화하기 쉬운 고령자나 지병이 있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치료하고 감염 확산 속도를 늦추는 것을 목표로 한 새로운 대책을 이르면 25일 마련해 시행할 방침이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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