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도 쫓긴 '사냥의 시간' 윤성현 감독 "우락부락한 영화"

입력 2020-02-26 06:28  

관객도 쫓긴 '사냥의 시간' 윤성현 감독 "우락부락한 영화"
베를린영화제서 인터뷰…"디스토피아 세계관 녹였지만, 쾌감 주고싶어"
"상업영화의 전형적 관습 아슬아슬하게 때론 과감하게 비껴가" 평가도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무서운 장면은 없었는데 무서웠어요."
베를린에서 지난 22일 영화 '사냥의 시간'의 첫 상영이 끝난 뒤 객석에서 일어서던 한 여성 관객이 동행자에게 한 이야기였다. 공포 영화가 아닌 총기 액션 장르를 보고선 한 말이었다.
베를린영화제 '스페셜 갈라' 부문에 초청된 '사냥의 시간'에서는 총격이 난무하지만 잔혹한 장면은 거의 볼 수 없다.
다음날 주독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한국 영화의 밤에서도 영화계 관계자들 사이에선 공포감을 느꼈다는 평들이 많이 나왔다.
주연 배우들의 표정, 숨소리, 사운드는 2시간 14분 간 관객들마저 주인공들과 함께 긴장감을 잠시 풀 사이도 없이 쫓기는 신세가 되도록 했다.
배우 박해수가 연기한 '한'은 관객들마저 추격했다.
더구나 회색빛 도시인 베를린과 '사냥의 시간'의 배경은 어울렸다. 영화는 한국이 심각한 경제 위기에 빠진 상황을 가정하고 거리의 청년들이 그린 그라피티를 자주 등장시켰다.
이런 배경은 1990년 통일 직후의 베를린을 연상시켰다. 동베를린 일부 지역에서는 거리의 젊은 예술가들이 공동화 현상으로 비어있는 건물을 점거해 창작 활동을 했다.
윤성현 감독은 23일 베를린에서 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도시에 남아있는 이런 흔적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그는 "베를린 같은 배경이 한국에 있었으면 제작비가 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농담조로 말했다.
윤 감독은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녹이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영화였다"면서 "시작점은 한국의 살기 팍팍한 현실이었다. 우화적인, 은유적인 형태로 청년들의 좌절감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영화에서 빈민가의 형태를 많이 참고해 표현했단다.


그런데 "단순히 아포칼립스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거리의 그라피티를 통해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도 청년들이 만들어나가는 길거리 문화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엄청난 메시지를 주려고 만들거나 파수꾼처럼 인간을 통찰하려는 영화가 아닙니다.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긴장감 있게 담고 싶었어요. 관객에게 대결에서 오는 쾌감을 주고 싶었습니다. 관객이 마치 롤러코스터에 탑승한 것처럼 즐기면 좋겠습니다."
윤 감독은 2011년 개봉한 독립영화 '파수꾼'으로 데뷔했다. 배우들의 심리 묘사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윤 감독은 청룡영화제 신임감독상을 받는 등 독립영화 한 편으로 충무로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윤 감독은 '사냥의 시간'을 '파수꾼'과 달리 "우락부락하고 직선적인 영화"라고 표현했다.
이제훈, 안재홍, 최우식, 박정민 등 친구로 설정이 된 4명의 배우는 마초적인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여줬다.
그런데 은근히 이들은 섬세한 느낌을 줬다. 보통의 상업적인 액션물에선 보기 쉽지 않은 묘사가 들어갔다.
"파수꾼은 감정의 깊이가 복잡하고 섬세한 영화인데, 이번 영화에선 이와 반대로 우락부락하고 직선적인 느낌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인물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섬세한 감정이 배역에 들어가 버린 것 같습니다."
윤 감독은 22일 첫 상영회에서 레드카펫을 밟았다. 영화 상영 전후로 무대에 올라 관객에게 인사도 했다.
"굉장히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배우들이 행복해하니 기뻤습니다. 관객들이 굉장히 재밌게 봐주신 것 같았습니다. '사냥의 시간'이 처음으로 상영한 것이라서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깊었습니다."



이제훈, 안재홍, 박정민, 박해수 배우가 이번 베를린영화제에서 윤 감독과 함께 레드카펫을 밟았다.
이제훈은 '파수꾼'에 출연해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박정민은 파수꾼이 첫 영화 출연작이다. '파수꾼'의 인연이 '사냥의 시간'으로 이어진 것이다.
박정민은 베를린 현지에서 인터뷰하는 윤 감독에게 애정이 어린 훈수를 두는 등 윤 감독을 챙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윤 감독은 현장에서 배우들의 배역 해석을 상당히 존중했다.
유독 담배 피우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 데 대해 "'한' 역할을 제외하고는 시나리오에 담배 피우는 것을 설정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담배를 피우지도 않는다. 그런데 배우들이 자기 배역을 해석하면서 자연스럽게 담배를 자주 피우게 됐다"고 말했다.
윤 감독은 '파수꾼' 이후 9년 만에야 차기작을 내놓았다.
"중간에 작업하던 작품들이 엎어지기도 했습니다. 지금 영화는 2015년부터 시나리오를 쓰게 됐고 2018년에야 촬영을 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여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번 작품에선 남성들 간의 우정에 초점을 맞췄는데, 다음에는 여성 캐릭터만 나오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여성 간 관계성의 질감은 남성들과는 다릅니다. 같이 영화를 하고 싶은 여성 배우들이 많습니다. 정유미는 20년 친구입니다. 김다미 배우는 인상적으로 작업을 같이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첫 상영회의 표는 인터넷에서 15분도 채 안 돼 매진됐다.
최근 몇 년간 상업 영화를 비롯한 한국의 많은 작품이 베를린영화제의 스크린에 올랐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매진된 것은 이례적이다.
제작사나 배급사 측에선 베를린영화제의 여세를 몰아 한국에서 흥행몰이를 노렸을 터다.
베를린영화제 이후 한국에서 배우들의 인터뷰들이 줄줄이 잡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애초 26일 개봉 예정이었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연기됐다.
연기 공지가 이뤄진 직후 윤 감독과의 인터뷰가 진행됐는데, 역시 연기 문제에 대해선 다소 난감해하는 분위기였다.
영화 '밀정' 제작사인 ㈜하얼빈의 이진숙 대표는 베를린에서 기자와 만나 '사냥의 시간'에 대해 "기존 한국 영화에 흔치 않은 총기 액션을 소재로 한 장르 영화이면서, 기존 상업 영화의 전형적 관습을 아슬아슬하게 때론 과감하게 비껴갔기 때문에 도발적인 쾌감을 주는 영화"라고 평가했다.
lkbi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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